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윤병주 시 '나무 시집보내기' 외 4편

김창집 2021. 3. 25. 12:15

나무 시집보내기

 

며칠 황사바람이 불더니 비가 내린다

늙은 신배나무 물올림 시작됐는지

나뭇가지의 맥박들이 빨라지기 시작한다

 

궂은 날 정월 대보름

구름들이 하릴없이 지루한 겨울날

사물놀이 징소리가 마을 어귀 신배나무를 깨우고

동네 사람들이 나뭇가지 사이에 돌과 새끼줄을 얹어서

아직은 날이 차지만 나무는 초례를 치른다

 

산골 구름의 안부 궁금해 할 나비

아직 날아올 날 멀었는데

마을 사람들은 벌써 꽃과 나비의 합궁 날을 택해

나무에게 주문을 건다

지나간 날과 길흉 종이를 하나씩 채우고

남쪽 구름을 불러 나뭇가지에 건다

 

볼이 불어진 산골 나무들은 무거운 돌을 가슴에 얹고

혼례 날을 기다리고 있다

주술의 힘이 나무에 맞닿으면

나무들의 폐는 한결 젊어질 것인가

 

아직은 나비와 벌은 나무로 돌아올 수 없고

허공의 장신구로 서 있기만 한데

공중의 태양이 달을 괜히 불러와

나비와 벌이 올 거라며 입소문을 내고 있다

 

하릴없는 동네 숫총각 나무들도

한겨울을 접고 멀리 돌아올 남동풍으로

산골 방언 소리 외우기 시작힌다

 

산마루 쪽 봄이 올 때는 아직 멀었는데

나무들의 몸짓이 심상치 않다

가려운 아랫도리를 긁는 나무들이

따뜻한 바람을 불러들이려 애쓰고 있다

 

곰치국

 

눈 내리는 날 항구의 밥집들은

곰치를 달여놓는다

바다를 미행하고 돌아온 어부들은

숙취의 입구에서 지나온 생을 나눈다

 

이런 날은 해안가 새들도

파도 소리를 키우며 봄을 기다리고

낮은 집들은 곰치살을 말리며

곰치가 돌아온 뱃길의 무게를 잠에 얹고 잔다

 

낮과 밤의 눈이 다녀갔을 항구의 후미진 골목

술꾼들은 구름 한켠에 세 들어

바닷가에 깃들던 술국의 살점 지나간 자리에

어부의 울음소리가 빠져들기도 한다

 

바다를 벗어난 고기로 푸른 날의 속을 풀고

바닷가 사람들은 아침을 맞는다

길고도 지루한 변방의 항구, 겨울 술자리엔

곰치국이 한 계절 사람들의 생을 기억한다

한겨울이 깊어져 가는 것이다

 

그림자 지우기

 

오대산으로 첫 시집을 보내준 사람 연락이 없다

지리산에서 우전차를 보내온 사람

금강경 시절 인연을 외우며

어린 당나귀 꼬리에 부서지던 햇살을 따라

함께 넘은 옛사람들은

다들 무엇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연락이 없다

 

높은 산 눈 녹은 물소리가 잠든 나무 이파리로 필 때

하늘의 중심을 잡고 날아가는 새를 바라보던 차마고도 길

마음과 삶은 길을 이어놓았는데

나는 잃어버린 것도 없이 어느 사람을 연민하다가

이곳까지 왔을까

바람에 팽팽해진 나뭇가지로 날아온 새가 울고 갈 때

마음의 심지 올린 봄날이 돌아갈 날을 기다린다

 

허공에 잎을 꺼내놓은 고산의 나무들은

서로의 간격을 줄이며 피고 있었는데

 

울진을 지나며

 

제 몸을 파도에 맡기고 뱃길을 열고 선 방파제 쪽에서

문득 사람과 관계한 버린 날들 속으로

나의 후회를 보고 싶을 때도 있지

해풍에 내다 말려서 빛나는 세간의 말을 버리고

헌 신발처럼 버리고 싶은 날도 있었지

 

큰 삶은 원하지 않아서

은어 철엔 은어를 따라가서 살고

남은 생은 창을 내고 고단한 생을 같이할

동백꽃처럼 볼이 붉은 사람이 있으면 좋지

그리고 살아온 날을 후회한들 무엇하냐고

찬바람에 등을 맞대고 살면 족하지

 

한 세월 낡은 폐선에서 저녁노을 지나간 시절을

난 왜 괴로워했나

 

때론 녹이 슨 몸과 근육에도 난장길로 접어들 때

알몸으로 살아가는 무심이 묵직할 때도 찾아오겠지

내 후회를 버리지 못하고 철들지 못한 뒷모습을 채우는데

울진쯤을 지나는데 댓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카프카를 읽어 주던 사람

 

그 사람을 보러 가는 날 사월의 눈이 내렸다

손잡이가 고장 난 문 앞엔 담배냄새가 났다

지나간 수사나 은유처럼 그의 전부를 걸었던

젊은 날의 고뇌와 문장들이 이제는 과거에 붙들려

작은 집 책장에 쌓이고 있다

 

모든 사상이나 지식은 활자나 책으로 꽃 피는 시간에

소통되지 못하면 사람들의 관심 밖에서

먼지로 쌓인 날을 담고 살기 마련

커피가 따뜻한 날의 현실을 외면 받듯

퀴퀴한 묵은 책 냄새로 버린 지식처럼

그와 내 몸을 따뜻하게 건너오고 있다

 

흩날리는 환청같이, 불안한 그의 눈빛처럼

창밖에 눈발들이 달려들었다

그는 한때 잘 나가는 노동자들을 대변하는 자객이었다

허나 지금은 눈이 크고 겁 많은 낙타의 몸으로

모든 것을 조심히 쓰고 읽고 들려준다

 

한때 그의 사상을 조절해 주던 아내는 깊은 병을 앓았고

습기 찬 지식은 갈 곳이 없어 보였다

어떤 세월이든 먼지의 지배를 받고

사람들의 외면을 당하기도 한다

먼지를 털어내면 햇살이 들기 시작할까

 

부조리한 한 시절을 열병처럼 건너오던 날들을

내게 한참을 쏟아 놓았다가 그는 잠이 들었다

푸석한 그의 집 책들이 더는 통풍되지 않은 채

무수한 진통이, 지나간 경직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창밖 나무들은 땀을 식힌 듯 바람에 흔들리며 지나갔다

 

 

                            *윤병주 시집 풋사과를 먹는 저녁(현대시학시인선060, 2020)에서

                            *봄꽃들 : 차례로 한계령풀, 모데미풀, 얼레지, 깽깽이풀, 동의나물, 산수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