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름다운 일생 – 김수열
그는 지금 오등동 산11-1번지에 잠들어 있다
건입동에 묻혔었는데 누군가 내리친 둔기에
비석이 두 동강 났다
대를 이을 손 없었고
생을 마감하기 전, 그는
대한극장 검표원이었다
그 전에 그는 생계를 위해
무근성에서 손바닥만한 쌀배급소를 운영한다
그 전에 그는 성산포 경찰서장이었다
한국전쟁 직후 예비검속 당시
관할구역 221명에 대한 총살명령을
‘부당하므로 불이행’으로 맞서 목숨을 살린다
그 전에 해방을 맞아 제주에 온 그는
모슬포경찰서 초대서장이었다
4.3 무렵 관할구역 좌익총책으로부터 100명의 명단을 확보
적극적으로 자수를 권유, 목숨을 살린다
그 전에 그는 독립군이었다
3.1운동 직후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단체인 국민부에 가입
중앙호위대장을 맡아 무장투쟁의 선봉에 선다
1897년에 나서 1966년에 생을 마감한 그 이름은
문형순이다
-시집 『호모 마스크스』(아시아, 2020)
♧ 북촌리에서 - 김경훈
더 이상 죽이지 마라
죽이지 마라 죽이지 말라고 살려달라고
애원성 보다 빠른 속도로 이미
발사된 총탄은 어김없이 산 목숨에 꽃혀
죽음의 길을 재촉한다
시체산피바다
수백의 죽음 속에서
살아남은 이의 내일은
또 다른 죽음
울음도 나오지 않는
원한이 사무쳐 구천에 가득할 때
젖먹이 하나 어미 피젖 빨며
자지러지게 울고
더 이상 죽이지 마라
너희도 모두 죽으리라
-제주4.3순례시집『까마귀가 전하는 말』(도서출판 각, 2017.)
♧ 만벵디 - 강덕환
그대, 기억하는가 섯알오름
듣도 보도 못한 골짜기
모진 광풍에 스러지던 칠석날 새벽
부모형제 임종 지키지 못한 불효
천년을 가도 지워지지 않는다는데
뼈마디 하나 겨우 추스른 주름진 세월
몇 번이나 새로 돋았을까 저 풀들
시퍼렇게 날 세우고, 진초록 물결로
그 새벽 이슬길 몇 번이나 밟아왔을까
옷은 얻어서 옷이고
밥은 빌어서 밥인데
얻지도 빌지도 못한 혼백
견우별, 직녀별로 피어올라
인연의 질긴 끈 놓지 못하는 사이
기다림에 지쳐
살과 뼈는 흙으로 돌아가고
체온은 햇볕에게 보태어
야만의 땅엔 날줄과 씨줄로 곱게 엮은
저토록 고운 벌판인데
가진 것 비록 없어도
더불어 나누는 넉넉함으로
평화의 불씨 당겨 점화하오니
애원의 향으로 타오르십서.
상생의 촛농으로 흘러 내립서.
-시집 『그해 겨울은 춥기도 하였네』(풍경, 2010)
♧ 통점 - 이종형
햇살이 쟁쟁한 팔월 한낮
조천읍 선흘리 산 26번지 목시물굴에 들었다가
한 사나흘 족히 앓았습니다
들짐승조차 제 몸을 뒤집어야 할 만큼
좁디좁은 입구
키를 낮추고 몸을 비틀며
낮은 포복으로 엉금엉금 기어간 탓에 생긴
통점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해 겨울
좁은 굴속의 한기寒氣보다 더 차가운 공포에
시퍼렇게 질리다 끝내 윤기 잃고 시들어 간
이 빠진 사기그릇 몇 점
녹슨 솥뚜껑과
시절 모르는 아이의 발에서 벗겨진 하얀 고무신
그 앞에서라면
당신도 아마
오랫동안
숨이 막혔을 것입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처럼
사나흘 족히 앓아누웠을 것입니다
-시집 『꽃보다 먼저 다녀간 사람들』(삶창, 2017)
♧ 나는 아직도 역적인가 - 김성주
-- 4. 3과 연좌제
창밖 담벼락에
인동초 꽃피웠다
역적은 숨어사는 요령도 서툴러
을지문덕 꿈을 꾸며 육사를 지망했다
깨어보니 가슴팍엔 붉은 수인번호
스스로 툭, 지는 동백이고 싶었다
눈 내리는 섣달 밤
어미 등에 엎인 아이
쫓기는 노루처럼 눈이 큰 노루처럼
총소리에 놀래어 산으로 올랐다
어미젖 산 속에서 잃어버리고
허기진 입 속엔 빨간 멩게* 열매
명백한 대역죄로 수인 찍힌 세 살 아이
그 아기의 아이 자라
새처럼 날겠다며
항공대 항공운항과에서 날갯짓을 배우는데
양 날개 묶어놓은 연좌 사슬에
항공대 정문 밖으로 새는 떨어져
봄이 오고 언 강물이 풀린 지 언제냐고
인동꽃은 나더러 나오라는데
나는 왜, 이리도 손발 저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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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멩게 : 청미래덩굴의 제주어
-시집 『구멍』(도서출판 심지,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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