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세상

'제주작가' 2021년 봄호의 시(2)

김창집 2021. 4. 27. 14:24

물에서 온 인형 - 고영숙

 

웃자란 포만감을 갖고 노는

울음소리가 없는 오늘은

욕조 속 한 점 호흡이 사라진 하늘을 여닫네

물 안에서 계속 멀어지는 서늘한 입맞춤

 

욕조 밖은 낯선 바다

오래 웅크려 잠든 너를 깨웠을 텐데

얼굴을 만져 볼 수 없는

어딘가 신의 흔적이 있을 거야

 

시퍼런 들물과 날물의 어디쯤

쉽게 부러지는 흰 국화꽃

숨 쉬지 않는 수평선을 열고

물살을 넘기지 못하고 헐떡이는

 

몸을 내밀어봐

맡겨진 물빛 생이 아픈

더듬더듬 열린 말문에 아가미가 돋아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네가 웃고 있다

네 이름마저 굳어버려

끊겼다 이어지던 가벼운 인사

눈물 같은 비가 내리기를

 

항해 - 김광렬

 

내 손등에 사뿐히 내려앉던 나비가 놀라

어디론가 황급히 날아 가버린 것은

파도 떼 사납게 일렁여오는 바다처럼

내가 몹시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꽃 위에 살포시 내려앉은 나비가

그 자리에 마음 푸근히 오래 앉아 있었던 것은

꽃에게서

가만히 가라앉은

숨결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불안은 나를 끝없이 흔들리게 하고

너와 더욱 멀어지게 한다

언제면 아무런 두려움 없이

너는 나의 어느 곳에나 앉을 수 있을까

 

허나 나비여, 나의 불안은

영원히 고칠 수 없는 고질병 같은 것이다

너와 가까워지고 싶어도

가까워지기 어려운 나는 늘

 

난파 직전의 배처럼 이 세상을 항해한다

 

너를

불안에 떨게 하는 인간이어서 미안하다

 

에밀레종 소리 김순선

 

아침을 깨우는 수탉 같이

모두 잠든 고요한 밤에

각시야 -

각시야 -

단잠을 깨운다

 

날마다 한밤중이 되면

애타게 각시를 부른다

남자 병실에서 들려오는

에밀레종 소리

 

각시는 어디를 갔기에

저토록 애타게 부를까

그리움 같은

참회의 목소리로

 

각시야 -

각시야 -

감절한 기도소리 같은

남자의 절규

 

오후 3김영미

 

창문 너머에 있는 하늘을 멍하게 바라보거나

 

읽히지도 않는 책장을 넘기거나

 

영화를 보며 딴 생각에 젖거나

 

저녁노을이 될 태양의 햇살을 들춰보거나

 

마음에도 없는 잠을 청해보거나

 

저녁을 위해 냉장고를 뒤적거리거나

 

너덜거리는 그리움을 꺼내보거나

 

지겨워진 질문을 다시 시작하거나

 

잘못한 지난날에 몰입하여 시간여행자가 되어보거나

 

살아간다는 것은 김항신

 

1

우리는 죽음보다 더한 냉혹하고 절실한 체험이 아닐까

 

2

살아 있다는 것은

사람과 고독을 아는 고뇌의 저항일지도 모르지

 

이미 가버린 청춘의 날들 회상하며

다정한 모멸감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미죽은 시인일지도 몰라

 

나기철

 

동생네와 점심 먹으며

마신 막걸리

딱 한 잔

 

한라도서관

발열 체크대 앞에 서니

벨이 울린다

 

갈 데가 없다

 

 

                                            * 제주작가2021 봄호(통권 72)에서

                                             * 사진 : 2016430일 황매산 철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