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생란
고열로 며칠
앓고 난 후
불순물 태워버려 몸이 가볍다
헐거운 옷을 벗고
산으로 간다
바람 불지 않는 날에도
흔들리면서
고요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맑은 촛불처럼
마음을 밝게 열어주는 꽃
기다리고 있다
산다는 것 괴로움이면서
기쁨인 것을
말없이 내게 들려주고
이슬 걸러 뽑은
침묵의 향기 나누어 준다
꽃이여
네가 어디에 있을지라도
나를 향하여 있다면
맑게맑게 살 수 있겠네.
♧ 버릴 것 다 버리면
민들레 꽃씨가 바람에 날아간다
사람도 그러하리라
어느 날 다 익으면
버릴 것 다 버리면
꽃씨가 되어서
한없이 가벼워져서
땅에 묻히지 않고
얼마든지 날아갈 수 있다
저 무한 허공으로
♧ 그 여자의 수선화
그 여자 사는 법,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고생하며 자라
의로운 사람을 사랑한 죄밖에 없다
그 꽃이 피는 법,
가시덤불 굴헝에서
찬바람 눈보라 맞으면서도
순결한 향기로
피어나는 죄밖에 없다
♧ 엉겅퀴 꽃
누구라 알까
저 엉겅퀴 꽃의 외로움을
내돋힌 가시마다
안으로 끌어안은 사랑이라 하리
저 혼자 삭히는
불같은 마음이라 하리
바람만 내달리는
황량한 들판에
헤매는 그리움
묻어본 사람이나 알까
손가락 마디마디
피가 맺히는 사랑을
♧ 누구 나에게
누구 나에게
저 자귀나무 꽃 한 가지
꺾어 주지 않으려오
아라비아 공주의 눈꺼풀 같은
소근 대는 귓속말 같은
잡으려는 순간 사라지는 꿈결 같은
저 세상의 꽃
비린 욕정에 흔들리지 않은 누구
나를 위하여
분홍빛 명주실 피 흐르는
자귀나무 꽃 한 가지
달려가 꺾어주지 않으려오
♧ 돌매화(巖梅)
바람의 손금 같은 선율로
너는 핀다
내 마음의 산정에
그 차가운 벼랑에
칼바람 에이는 바위가슴에
피맺힌 발부리 가누어
결 곱게 피어나는
작은 꽃이여
야성의 혼이여
꺾이어 쓰러질 때마다
아픈 눈물 먼 훗날로 미루고
부르라
사랑하는 별의 이름을
♧ 에미의 노래
가다가 도라지 꽃밭을 만나거든
네 에미 아린 가슴인 줄 알아라
미녕적삼 몽당치마 하나로
그렇게 야윈 젊음 이울었느니
가다가 엉겅퀴 밭을 만나거든
네 에미 아픔 가슴인 줄 알아라
걸음걸음마다 가시 돋아
그렇게 눈물지며 살았느니
가다가 고사리 밭을 만나거든
네 에미 설운 가슴인 줄 알아라
꺾이어도 꺾이어도 다시 돋아
그렇게 되살아나며 살았느니
*김순이 시집 『오름에 피는 꽃』(도서출판 제주문화, 2000)에서
'아름다운 세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홍성운의 시조와 등나무 꽃 (0) | 2021.05.02 |
---|---|
백두산의 야생화를 위하여 (0) | 2021.04.30 |
'제주작가' 2021년 봄호의 시(2) (0) | 2021.04.27 |
권경업 시 '봄이 오는 지리산' 외 5편 (0) | 2021.04.25 |
洪海里 시 속의 봄꽃 (0) | 2021.04.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