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세상

김순이 시인의 야생화 시편

김창집 2021. 4. 28. 18:37

야생란

 

고열로 며칠

앓고 난 후

불순물 태워버려 몸이 가볍다

헐거운 옷을 벗고

산으로 간다

바람 불지 않는 날에도

흔들리면서

고요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맑은 촛불처럼

마음을 밝게 열어주는 꽃

기다리고 있다

산다는 것 괴로움이면서

기쁨인 것을

말없이 내게 들려주고

이슬 걸러 뽑은

침묵의 향기 나누어 준다

 

꽃이여

네가 어디에 있을지라도

나를 향하여 있다면

맑게맑게 살 수 있겠네.

 

버릴 것 다 버리면

 

민들레 꽃씨가 바람에 날아간다

사람도 그러하리라

어느 날 다 익으면

버릴 것 다 버리면

꽃씨가 되어서

한없이 가벼워져서

땅에 묻히지 않고

얼마든지 날아갈 수 있다

저 무한 허공으로

 

그 여자의 수선화

 

그 여자 사는 법,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고생하며 자라

의로운 사람을 사랑한 죄밖에 없다

 

그 꽃이 피는 법,

가시덤불 굴헝에서

찬바람 눈보라 맞으면서도

순결한 향기로

피어나는 죄밖에 없다

 

엉겅퀴 꽃

 

누구라 알까

저 엉겅퀴 꽃의 외로움을

 

내돋힌 가시마다

안으로 끌어안은 사랑이라 하리

저 혼자 삭히는

불같은 마음이라 하리

 

바람만 내달리는

황량한 들판에

헤매는 그리움

묻어본 사람이나 알까

 

손가락 마디마디

피가 맺히는 사랑을

 

누구 나에게

 

누구 나에게

저 자귀나무 꽃 한 가지

꺾어 주지 않으려오

 

아라비아 공주의 눈꺼풀 같은

소근 대는 귓속말 같은

잡으려는 순간 사라지는 꿈결 같은

저 세상의 꽃

 

비린 욕정에 흔들리지 않은 누구

나를 위하여

분홍빛 명주실 피 흐르는

자귀나무 꽃 한 가지

달려가 꺾어주지 않으려오

 

돌매화(巖梅)

 

바람의 손금 같은 선율로

너는 핀다

 

내 마음의 산정에

그 차가운 벼랑에

 

칼바람 에이는 바위가슴에

피맺힌 발부리 가누어

결 곱게 피어나는

작은 꽃이여

야성의 혼이여

 

꺾이어 쓰러질 때마다

아픈 눈물 먼 훗날로 미루고

부르라

사랑하는 별의 이름을

 

에미의 노래

 

가다가 도라지 꽃밭을 만나거든

네 에미 아린 가슴인 줄 알아라

미녕적삼 몽당치마 하나로

그렇게 야윈 젊음 이울었느니

 

가다가 엉겅퀴 밭을 만나거든

네 에미 아픔 가슴인 줄 알아라

걸음걸음마다 가시 돋아

그렇게 눈물지며 살았느니

 

가다가 고사리 밭을 만나거든

네 에미 설운 가슴인 줄 알아라

꺾이어도 꺾이어도 다시 돋아

그렇게 되살아나며 살았느니

 

 

                             *김순이 시집 오름에 피는 꽃(도서출판 제주문화, 2000)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