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세상

권경업 시 '봄이 오는 지리산' 외 5편

김창집 2021. 4. 25. 21:07

봄이 오는 지리산

 

남도사투리, 인정으로 배어 있는 땅

당신이 점지한 아들들의 뜨거운 피를

무슨 시샘에

당신의 치마폭 이 산자락을

그토록 붉게 물들였나요

 

백무동 깊은 골 잔설이 녹고

올해도 철쭉은 그 피 그 넋으로 피는데

백두로 가는 길 아직도 멀고

천왕봉 오는 길 너무 거칠어

 

아서요 말어요

할머니 시샘 꽃샘바람은요

그날처럼 꽃망울들 핏빛으로 지고

잔돌평전 옛이야기

두견새 먼 울음으로 들려옵니다

 

등산

 

오르는 것이 아니네

내려오는 것이네

굽이굽이, 두고 온 사연만큼

해거름 길어지는 산 그림자

막소주 몇 잔, 목젖 쩌르르 삼키듯

그렇게 마시는 것이네

거기 묵김치 같은 인생 몇 쪽

우적우적 씹는 것이네

지나 보면 세상사 다 그립듯

돌아 보이는 능선길

그게 즐거움이거든.

 

산벚꽃 그늘 아래

 

저건 소리 없는 아우성 같지만 실은,

사랑한다는

너에게 보이려는 소리 없는 고백이야

 

생각해 봐

저러기까지 얼마나 많은 밤을

그것도 겨울밤을, 비탈에 서서

발 동동 구르며 가슴 졸인 줄

 

생각해 보라구

이제사 네가 등이라도 기대주니까 말이지

저렇게 환히 웃기까지의 저 숱한 사연들을, 고스란히

몸속에 품어두었던 그 겨울이

얼마나 고통스러웠겠니

 

생각해 보면, 뭐 세상 별것 아니지만

먼 산만 싸돌아다니던 네가

그저, 멧꿩 소리 한가한 날

잠시 옆에 앉아 낭랑히 시라도 몇 줄 읽어주며

정말 곱구만 고와

그런 따뜻한 말 몇 마디 듣고 싶었던 거라구

 

보라구,

글쎄, 금방 글썽글썽해져

꽃잎 후두둑 눈물처럼 지우잖아

 

구례 벗에게

 

섬진강가 살얼음 풀리고

노고단에 봄빛 어린다니

그 정말 반가우이

운봉, 일월 내려다보이는 만복대에

억새는 돋을 테니

올해는 그대에게도 만복의 기운이

억새 새순처럼 돋기를 비네

 

쉬 가는 봄이라지만 언제 날을 붙잡아

성삼재 새로 뚫린 고갯마루에

그대 보해소주를 품어오고

나는 기장미역 귀다리라도 싸 가지고 가

주거니 받거니 봄을 노래하세

해질 녘 노을에 취기가 돌면

나는 백두대간 북으로

그대는 남낙정맥 동으로

 

바래봉 철쭉

 

그대 바라볼 수 있음은

소리치지 못하는 환희입니다

 

화냥기라구요?

아니에요, 그저 바라만보다 시드는

바래봉 노을입니다

 

아니 노을 같은 눈물입니다

눈물 같은 고백입니다

 

아름답도록 서글프던, 생강나무 꽃처럼 작은 이야기

 

유난히 목덜미가 희던 그 아이

궁벽한 살림 입 하나 줄이느라

진주인가, 어디 마산인가 대처大處살이 3년에

애비 모르는 씨를 품고

밥 짓는 연기 갈피 잃은 해거름

땡감나무 빈가지 바람만 요란한 신밭골을

돌담길 땅거미이듯, 달랑 안은 보퉁이

마른버짐 핀 얼굴 떨군 고개로 스며들었다

남사스럽다며 늙은 아비는, 고스란히

깡소주로 겨울을 넘겼고

어미는 삽작 밖 마실을 다니지 못했다

 

퉁퉁 불은 젖가슴 벙근 유두乳頭처럼

왕등재 생강나무 노란 꽃이 피던 날

가녀린 목 가늘게 떨며

새벽부터 시작된 산고産苦에도

쇠죽아궁이 더운물은 끝내 쓸 일 없었다

고향을 지키던 대원사 불목하니 오래비는

쪽 마당 귀퉁이에서, 네에미씨팔 네미시발

아지랑이 몸살 앓는 봄산에다 대고

오후 내내, 알지 못할 군소리만 씨부렁 시부렁

 

어느 해 한식날, 외손주라며

제법 다 큰 소년 둘을 데리고

묵정밭 밭두렁 제 아비 무덤에

중년의 환한 그 아이가 다녀갔다, 말끔한 승용차 편으로

 

이제는 모두의 기억 저편에서 풍화해 버린,

입덧으로 비린 것이 먹고 싶다며 어미를 조르던

아름답도록 서글프던 아주 오래 전의

생강나무 꽃처럼 작은 이야기가 있었다

 

 

                      * 권경업의 지리산 시편 뜨거운 것은 다 바람이 되었다(작가마을, 2012)에서

                                      * 사진 : 201451014일 지리산 종주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