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이 오는 지리산
남도사투리, 인정으로 배어 있는 땅
당신이 점지한 아들들의 뜨거운 피를
무슨 시샘에
당신의 치마폭 이 산자락을
그토록 붉게 물들였나요
백무동 깊은 골 잔설이 녹고
올해도 철쭉은 그 피 그 넋으로 피는데
백두로 가는 길 아직도 멀고
천왕봉 오는 길 너무 거칠어
아서요 말어요
할머니 시샘 꽃샘바람은요
그날처럼 꽃망울들 핏빛으로 지고
잔돌평전 옛이야기
두견새 먼 울음으로 들려옵니다
♧ 등산
오르는 것이 아니네
내려오는 것이네
굽이굽이, 두고 온 사연만큼
해거름 길어지는 산 그림자
막소주 몇 잔, 목젖 쩌르르 삼키듯
그렇게 마시는 것이네
거기 묵김치 같은 인생 몇 쪽
우적우적 씹는 것이네
지나 보면 세상사 다 그립듯
돌아 보이는 능선길
그게 즐거움이거든.
♧ 산벚꽃 그늘 아래
저건 소리 없는 아우성 같지만 실은,
사랑한다는
너에게 보이려는 소리 없는 고백이야
생각해 봐
저러기까지 얼마나 많은 밤을
그것도 겨울밤을, 비탈에 서서
발 동동 구르며 가슴 졸인 줄
생각해 보라구
이제사 네가 등이라도 기대주니까 말이지
저렇게 환히 웃기까지의 저 숱한 사연들을, 고스란히
몸속에 품어두었던 그 겨울이
얼마나 고통스러웠겠니
생각해 보면, 뭐 세상 별것 아니지만
먼 산만 싸돌아다니던 네가
그저, 멧꿩 소리 한가한 날
잠시 옆에 앉아 낭랑히 시라도 몇 줄 읽어주며
“정말 곱구만 고와”
그런 따뜻한 말 몇 마디 듣고 싶었던 거라구
보라구, 봐
글쎄, 금방 글썽글썽해져
꽃잎 후두둑 눈물처럼 지우잖아
♧ 구례 벗에게
섬진강가 살얼음 풀리고
노고단에 봄빛 어린다니
그 정말 반가우이
운봉, 일월 내려다보이는 만복대에
억새는 돋을 테니
올해는 그대에게도 만복의 기운이
억새 새순처럼 돋기를 비네
쉬 가는 봄이라지만 언제 날을 붙잡아
성삼재 새로 뚫린 고갯마루에
그대 보해소주를 품어오고
나는 기장미역 귀다리라도 싸 가지고 가
주거니 받거니 봄을 노래하세
해질 녘 노을에 취기가 돌면
나는 백두대간 북으로
그대는 남낙정맥 동으로
♧ 바래봉 철쭉
그대 바라볼 수 있음은
소리치지 못하는 환희입니다
화냥기라구요?
아니에요, 그저 바라만보다 시드는
바래봉 노을입니다
아니 노을 같은 눈물입니다
눈물 같은 고백입니다
♧ 아름답도록 서글프던, 생강나무 꽃처럼 작은 이야기
유난히 목덜미가 희던 그 아이
궁벽한 살림 입 하나 줄이느라
진주인가, 어디 마산인가 대처大處살이 3년에
애비 모르는 씨를 품고
밥 짓는 연기 갈피 잃은 해거름
땡감나무 빈가지 바람만 요란한 신밭골을
돌담길 땅거미이듯, 달랑 안은 보퉁이
마른버짐 핀 얼굴 떨군 고개로 스며들었다
남사스럽다며 늙은 아비는, 고스란히
깡소주로 겨울을 넘겼고
어미는 삽작 밖 마실을 다니지 못했다
퉁퉁 불은 젖가슴 벙근 유두乳頭처럼
왕등재 생강나무 노란 꽃이 피던 날
가녀린 목 가늘게 떨며
새벽부터 시작된 산고産苦에도
쇠죽아궁이 더운물은 끝내 쓸 일 없었다
고향을 지키던 대원사 불목하니 오래비는
쪽 마당 귀퉁이에서, 네에미씨팔 네미시발
아지랑이 몸살 앓는 봄산에다 대고
오후 내내, 알지 못할 군소리만 씨부렁 시부렁
어느 해 한식날, 외손주라며
제법 다 큰 소년 둘을 데리고
묵정밭 밭두렁 제 아비 무덤에
중년의 환한 그 아이가 다녀갔다, 말끔한 승용차 편으로
이제는 모두의 기억 저편에서 풍화해 버린,
입덧으로 비린 것이 먹고 싶다며 어미를 조르던
아름답도록 서글프던 아주 오래 전의
생강나무 꽃처럼 작은 이야기가 있었다
* 권경업의 지리산 시편 『뜨거운 것은 다 바람이 되었다』(작가마을, 2012)에서
* 사진 : 2014년 5월 10일〜14일 지리산 종주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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