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숲길 - 권경업
숲은, 제 몸 갈라 길을 냈습니다
시닥나무 물들메 까치박달
아기배나무 사이 실개천 지나
타박타박, 길짐승 산책하며
부엉이랑 올빼미 밤이면 깃 내립니다
가끔, 야산野山 비둘기 자고 가는 신갈 숲 속
장끼 까투리, 갈잎 덤불 긁어모아 살림 내는 날
산山사람 몇 지나갔습니다
얼마 뒤, 그들 품에 열리는 오솔길 한 올
누군가가 열리는 그 오솔길로, 다시
조잘대며 지나갑니다
“들리니 들려
저 새소리 물소리하며
조릿대 헤집는 저 바람소리하며
어머나 어머나 저기 장당골
함박꽃 향기 자옥한
아침이 밝아 오는 걸”
스스로를 비위 낸 길
서로가 서로에게 길 되어
세상의 모든 길, 동무 되어 갑니다
♧ 룽다* - 권경업
설산雪山 히말라야 사람들은
부처님 말씀을 정성껏 따릅니다.
부처님 말씀을 따르면서
그 말씀 전해 듣지 못한 중생들을 위해
높다라니 룽다를 내어 겁니다.
룽다는, 부처님 말씀을 판본板本으로 찍어
솟대 끝에 매달은 오색의 깃발입니다.
바람이 불적마다 룽다는 펄럭이고
펄럭일 때마다 자비로운 말씀은
바람에 실려 천지사방으로 퍼져나갑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
마음마저 가닿을 수 없는 머나먼 곳까지
그리하여 뭇 중생들 마음의 평화를 얻고
세상 온통 진리의 말씀으로 가득하게 되라는,
어질고 착한 히말라야 사람들의 원願입니다.
한없이 하늘 맑은 이 가을 아침
아름다운 이의 글을 따라
대원사로 발길 옮기다가, 문득
바람 부는 내 가슴 깊은 곳에
깃발 하나 내어걸었습니다
무서리에 젖어, 혹 펄럭이지 않을 깃발 하나
솟대 끝에 내걸었습니다.
기러기 날아 가버린 솟대 끝에 내걸었습니다.
자꾸만 사위어가는 계절의 모퉁이
가여운 영혼 오도카니 있음을 알리는
흔들어 애타는 깃발 하나 바람 앞에 내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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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룽다 : 바람의 말이라는 뜻의 티베트어
♧ 산은 바다입니다
산은,
파도 밀려가고 밀려오는
푸른 숲 출렁이는 바다입니다
신갈 숲 달빛, 물비늘로 반짝이는
치밭목은 천삼백 고지(高地) 그 바다에 떠 있는 섬입니다
봄날 평촌리 잠녀(潛女)들
나물 캐는 자맥질에 넋 놓는 섬
내 어릴 때의 아쉬움 송송 솟아나
물결이 되어 밀려가고 밀려오는
아득한 그리움의 샘이 있는 섬입니다
고운 모래알로 부서지는 아침 햇살
물새 대신 찌르레기 우짖어
소녀같은 꽃구름들 샘물 위에 재잘대며
때로는 먹장구름 억수비 쏟아지던 섬입니다
배를 타고 가다 비를 맞으면
그것도 구비진 능선에서 흠뻑 맞으면
온기 있는 가슴이 그립듯
쫓고 쫓기는 일상 속, 하루분의 분진과 소음을
정량으로 먹어대야 하는 이 도시에서
쪽배라도 타고 그 섬에 가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맑고 차디찬 그리움 길어 올려
벌컥벌컥, 말라비틀어진 이 가슴
적시고 싶습니다
♧ 천상진언天上瞋言 - 권경업
윤허允許 없이,
기백 원짜리 입장권 들고
통천문通天門 지나 하늘에 오르지 마라
황금보다 빛나고 수정보다 더 맑던 천계天界가
기고만장 속俗 것들의 범접犯接으로
더럽혀지고 훼손되고 있다
망극罔極의 성은聖恩을 입은 너희들
지상地上을 요절낸 것 모자라
이제 하늘까지 넘보니
오호애재嗚呼哀哉라 이 일을 어이할꼬
상上께서 진노하시면
천상의 해돋이 훔쳐 본 발칙한 자들
그 눈 먼저 멀게 하고
삼족의 멸滅과 구대의 화禍를 내리리라
눈 있는 자 듣고 귀 있는 자 보라
보체寶體에 오물을 끼얹고
아름답던 자락 짓이긴 뒤, 그 허리결 도륙屠戮낸 이들
온전할 줄 알았더냐
지금 삼신노고三神老姑께서
당신이 점지해 준 명命을 거두어들이고 계신다
삼대三代 덕德을 쌓은 것이고 삼대三代 길吉하리란
천왕봉 일출의 요상한 낭설浪說
그 탐욕스러움을 버려라
정월 초하루 일간지에 실린 존영尊影은
발 디딜 틈 하나 없는 저잣바닥
그러고서 서기瑞氣를 받겠다니
염치廉恥 없고 한심하기 짝이 없는 것들
피가 붉은 이들 결코, 그 곳에 가서는 안될 것인즉
하늘의 두려움을 살 것이니라
무지몰각無知沒覺한 자들아
진정 너희에게 이르노니
오만방자傲慢放恣함과 불경不敬의 죄를 회개하라
심판의 날이 가까왔다
가이없는 하늘의 사랑을 찬양讚揚하고 경외敬畏하라
범사凡事에 공겸恭謙하라
그러함이 너희 집과 너희 이웃을 구함이니라
이르고 이르노니 명심銘心하라
이 천상진언天上瞋言을 들은 자者
들은 대로 행行할진저
--단군성조檀君聖祖께서 개천開川하신지 사천삼백스물여덟 해되는 을해년乙亥年 정월正月에 칙교勅敎를 받들어 관악재觀嶽齋에서 소산小山 읍揖하고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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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천문通天門 : 지리산 천왕봉에 있는 지명, 장터목 쪽에서는 이곳을 지나야만 천왕봉에 오를 수 있다.
♧ 그 곳은
그 곳은 우리 모든 것의 발원지
파도는 언제나 높아도 다만 출렁이지 않는
초록의 바다
갈매기의 흰 날개짓 대신
멧비둘기 바람의 길을 따라 헤엄쳐오는
고즈넉한 평화
능선을 떠다니는 원색의 천막은
산꾼의 꿈을 싣고 갈 작은 밤배
어두운 항로의 두려움보다 내일의 희망이
이물과 고물에서 수런거리고
저녁 어스럼, 파도와 파도 사이로 난
작은 오솔길을 굽어보는 나는 항해사
새로 돋는 달빛, 떡갈잎에 물비늘로 휘번득거리는
이 밤의 항해 끝에 가 닿을 곳은
물길릿수 삼천리 함께 출렁이고
하얀 포말로 밀려들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백두라는 이름의 항구
*권경업 지리산 시편 『뜨거운 것은, 다 바람이 되었다』 (작가마을, 2012.)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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