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장 바당 - 오승철
꿔올 걸 꿔와야지
사내를 꿔왔다고?
방사탑도 막지 못한 4·3이며 6·25
옆 마을 함덕리에서 쌀 꾸듯 꿔왔다고?
여자는 안 된다고 그 누구도 말 안했다
저 바다 거센 물결
주름잡는 대상군마저
이장 일 맡는다는 건 꿈도 꾸질 못했다
그 어떤 난리통에도 갚을 건 갚아야지
몇 마지기 밭처럼 내어준 바당 한 켠
밤이면 별빛 한 무리
자맥질하는 가슴 한 켠
♧ 비와사폭포 - 문순자
때 아닌 역병으로 병원도 한산하다
사나흘이 멀다하고 어머니 따라들면
콸콸콸 산소호흡기
폭포소리 들린다
비가 와야 폭포다, 비와사폭포란다
서귀포 악근천 상류 협곡을 끌고 와서
한바탕 뚝 터진 가슴 비워내고 가는 벼랑
길어봤자 사나흘
비 그치면 도루묵인데
아프다, 아프다는 건 살아있단 반증이다
어머니 한 생애 같은
엉또폭포 울음 같은
♧ 어떤 연緣 - 조영자
켜 놓은 티브이에 눈길이 확, 꽂혔다
대파밭 갈아엎는 초로의 진도 농부
저것은 파도 소리다,
트랙터 녹슨 이름
1970년 어느 겨울,
제주행 아리랑호
다섯 식구 이삿날 등 떠미는 하늬바람,
그 바다 그 하얀 뱃길 나와 연緣을 맺다니
간간히 숨비소리 같이 목젖에 남은 가락
대파 값 감귤 값이 오르거나 말거나
진도댁 눈물에 도는
아리아리 진도아리랑
♧ 사랑니 - 김신자
혼자서 끙끙 앓던 휑한 자취방에서
밤새워 모진 통증 눈물로 받아내던
뾰족이 살 뚫고 오른 사랑이란 그 이름
욱신거린 잇몸보다 더 아리게 아픈 건
곁 주는 이 하나 없는 혼자라는 외로움
서러워 울다 지친 밤, 간절한 당신 생각
내 편도 알아주는 이도 아무도 없어서
스무 살 그 밤처럼 가슴만 오려낸다
뿌리째 뽑으려 하니 더 그리운 사람아
당신은 아시려나 이리도 못 견딘 걸
내 속에 왜 돋아서 아프게 하시는가
말해도 모른 척할 사람 아무래도 빼야지
♧ 벌통생각 8 - 강현수
유채꽃도 아카시아도
이제는 작별이다
아버지는 떠났어도
할말 있다 내게 묻는
돈내코 맑은 물소리
물고 오는 벌떼들
♧ 홀어멍돌 - 김영순
남향집 짓지 마라
홀어멍돌 보일라
얼결에 혼자되신 땅나리꽃 어머니
그 바다 그 바위마저 저렇게 울었을까
하나가 모자라서 전설이 된다지만
일출봉 옆마을에 느닷없이 나앉은 돌
그 누가 무엇을 보고 홀어멍이라 부르나
포구에 삼삼오오 둘러앉은 성게철
절반은 파도소리 절반은 숨비소리
한 양푼 어머니 가슴에
섬 하나 들앉는다
♧ 모노드라마 - 이명숙
꿈이니 꿈인 거니 너의 눈빛이 시려
의식과 무의식 사이
나만큼 혼란하면
돌아와
우리는 우리 정해진 건 우리뿐
언제든 멋대로 또 보랏빛 꽃이 피면 너를 불러도 될까
널 닮은 꽃이 피면
이 방은 사라질 거야 빛을 넘어
빛으로
빗물이 뜨거워서 바람이 뜨거워서
내 안의 고양이가 초록빛 불을 켜서
날 위해 너를 위해서 우리들을 위해서
♧ 파랑새 소녀* - 김양희
눈도 코도 입도 귀도 없는 대나무가
눈도 코도 혀도 귀도 없는 대나무를
두 손에
떠받쳐 올려
서로를 바라본다
소녀는 마음으로 파랑새는 부리로
전장에 스러져 간 평화를 세우는 말
이래도
우린 괜찮아
서 있잖아
세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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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 알뜨르 비행장에 세운 대나무 대형 조형물.
-정드리문학 제9집 『내게도 한 방은 있다』(다층, 2021)에서
* 사진 : 어성초(약모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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