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정드리문학' 제9집의 시조(4)

김창집 2021. 7. 5. 13:46

이장 바당 - 오승철

 

꿔올 걸 꿔와야지

사내를 꿔왔다고?

방사탑도 막지 못한 4·3이며 6·25

옆 마을 함덕리에서 쌀 꾸듯 꿔왔다고?

 

여자는 안 된다고 그 누구도 말 안했다

저 바다 거센 물결

주름잡는 대상군마저

이장 일 맡는다는 건 꿈도 꾸질 못했다

 

그 어떤 난리통에도 갚을 건 갚아야지

몇 마지기 밭처럼 내어준 바당 한 켠

밤이면 별빛 한 무리

자맥질하는 가슴 한 켠

 

비와사폭포 - 문순자

 

때 아닌 역병으로 병원도 한산하다

사나흘이 멀다하고 어머니 따라들면

콸콸콸 산소호흡기

폭포소리 들린다

 

비가 와야 폭포다, 비와사폭포란다

서귀포 악근천 상류 협곡을 끌고 와서

한바탕 뚝 터진 가슴 비워내고 가는 벼랑

 

길어봤자 사나흘

비 그치면 도루묵인데

아프다, 아프다는 건 살아있단 반증이다

어머니 한 생애 같은

엉또폭포 울음 같은

 

어떤 연- 조영자

 

켜 놓은 티브이에 눈길이 확, 꽂혔다

대파밭 갈아엎는 초로의 진도 농부

저것은 파도 소리다,

트랙터 녹슨 이름

 

1970년 어느 겨울,

제주행 아리랑호

다섯 식구 이삿날 등 떠미는 하늬바람,

그 바다 그 하얀 뱃길 나와 연을 맺다니

 

간간히 숨비소리 같이 목젖에 남은 가락

대파 값 감귤 값이 오르거나 말거나

진도댁 눈물에 도는

아리아리 진도아리랑

 

사랑니 - 김신자

 

혼자서 끙끙 앓던 휑한 자취방에서

밤새워 모진 통증 눈물로 받아내던

뾰족이 살 뚫고 오른 사랑이란 그 이름

 

욱신거린 잇몸보다 더 아리게 아픈 건

곁 주는 이 하나 없는 혼자라는 외로움

서러워 울다 지친 밤, 간절한 당신 생각

 

내 편도 알아주는 이도 아무도 없어서

스무 살 그 밤처럼 가슴만 오려낸다

뿌리째 뽑으려 하니 더 그리운 사람아

 

당신은 아시려나 이리도 못 견딘 걸

내 속에 왜 돋아서 아프게 하시는가

말해도 모른 척할 사람 아무래도 빼야지

 

벌통생각 8 - 강현수

 

유채꽃도 아카시아도

이제는 작별이다

아버지는 떠났어도

할말 있다 내게 묻는

돈내코 맑은 물소리

물고 오는 벌떼들

 

홀어멍돌 - 김영순

 

남향집 짓지 마라

홀어멍돌 보일라

얼결에 혼자되신 땅나리꽃 어머니

그 바다 그 바위마저 저렇게 울었을까

 

하나가 모자라서 전설이 된다지만

일출봉 옆마을에 느닷없이 나앉은 돌

그 누가 무엇을 보고 홀어멍이라 부르나

 

포구에 삼삼오오 둘러앉은 성게철

절반은 파도소리 절반은 숨비소리

한 양푼 어머니 가슴에

섬 하나 들앉는다

 

모노드라마 - 이명숙

 

꿈이니 꿈인 거니 너의 눈빛이 시려

의식과 무의식 사이

나만큼 혼란하면

돌아와

우리는 우리 정해진 건 우리뿐

 

언제든 멋대로 또 보랏빛 꽃이 피면 너를 불러도 될까

널 닮은 꽃이 피면

이 방은 사라질 거야 빛을 넘어

빛으로

 

빗물이 뜨거워서 바람이 뜨거워서

내 안의 고양이가 초록빛 불을 켜서

날 위해 너를 위해서 우리들을 위해서

 

파랑새 소녀* - 김양희

 

눈도 코도 입도 귀도 없는 대나무가

눈도 코도 혀도 귀도 없는 대나무를

 

두 손에

떠받쳐 올려

서로를 바라본다

 

소녀는 마음으로 파랑새는 부리로

전장에 스러져 간 평화를 세우는 말

 

이래도

우린 괜찮아

서 있잖아

세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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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 알뜨르 비행장에 세운 대나무 대형 조형물.

 

 

                                -정드리문학 제9내게도 한 방은 있다(다층, 2021)에서

                                                 * 사진 : 어성초(약모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