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우리詩' 2021년 7월호의 시들(2)

김창집 2021. 7. 11. 07:23

모래 위 지렁이 - 김정식

 

장대비 쏟아진 오후, 하늘에서 잃은 다리

상처받은 몸을 이끌며 사막을 걷는다

눈부신 태양에 실명한 지 오래,

땅으로 떨어지는 콕 콕 찌르는 바늘에

눈감은 슬픔을 덮으며 간다

내리쬐는 따가운 햇볕이

내 부드러운 피부를 막을 때

날숨과 들숨으로 부목을 받히며

길어진 몸을 움츠렸다 펴가며 삼보일배한다

내 몸은 대지가 되고

몸을 웅크리며 어찌할 수 없는

시듦은 피부로 스며든다

협곡에 떨어진 관절은 백팔 염주가 되어

바퀴 없는 빈 수레를 끌며 굴러가고

눈의 장막은 어둠을 부수며

귀의 진공은 고막을 뚫어

관음(觀音)의 소리를 듣는다

천개의 다리와 천개의 눈은 있으나

태양에 가려져 있을 뿐

골짜기를 따라 부유하는 그늘을 찾아

거친 모래 닦으며 붉어져 가는 순례길

 

감자 배꼽 내 배꼽

 

조림용 햇감자에 덜 여문 배꼽

캄캄한 뱃속에서 어미를 받아먹은 자리다

 

흙을 씻자 산비둘기 울음과 찔레꽃 향기

나뭇잎의 연두와 명지바람 발자국이 찍혔다

 

내가 먹고 내 아이가 먹은

살과 뼈가 건너온 엄마의 폐역

 

배의 중간쯤 쑤욱 들어가 끊어진 길에

바람의 연고가 발라져 있다

 

핏줄끼리 목숨을 주고받은 종착역에서

따뜻한 심장이 뛰던 소리 두근두근 들린다

 

강의실 - 임보

 

시인 박종달의 강의실은

거의 학교의 교실이 아니다

어느 때는 소나무 밑이기도 하고

또 어느 때는 강가이기도 하다

 

오늘은

서너 명의 제자들을 이끌고

허름한 주막으로 들어간다

 

오늘의 강의는 홍탁이다

삭힌 홍어 안주에 동동주

 

썩은 생선을 먹으면 배탈이 난다고?

썩혀서 먹어야 제맛인 생선도 있다

 

안주면 다 안주라고?

궁합이 맞아야 제 안주다!

 

, 한 잔씩 쭉 걸치자!

오늘 강의 끝!

 

고양이의 꿈 - 이장희

 

시내 위에 돌다리

다리 아래 버드나무

봄 안개 어리인 시냇가에, 푸른 고양이

곱다랗게 단장하고 빗겨 있소, 울고 있소,

기름진 꼬리를 쳐들고

 

밝은 애달픈 노래를 부르지요.

푸른 고양이는 물오른 버드나무에 스르르 올라가

버들가지를 안고 버들가지를 흔들며

또 목 놓아 웁니다, 노래를 부릅니다.

 

멀리서 검은 그림자가 움직이고,

칼날이 은같이 번쩍이더니,

푸른 고양이도 볼 수 없고,

꽃다운 소리도 들을 수 없고,

그저 쓸쓸한 모래 위에 선혈鮮血이 흘러 있소.

 

파랑새 - 도경희

 

날지 않으면 길을 잃는다

 

산두밭 날초리

줄지어 선 해묵은 두릅

눈 떴다

 

장대 끄트머리에 앉아

숨 틔워주는

해와 달

가슴 가득 내려받는가

 

날개에 은빛 금빛 햇빛 수놓인

고운 새

붉은 부리로 깃을 털자

성큼 눈앞에 다가오는 먼 산

눈물 깊은 골짜기

 

다리에 주름 많은 새가

순하게 조아리고

기도의 메아리 듣고 싶어

짧게 짧게 바치는 화살기도

 

포롱포롱 하늘에 길을 내자

새벽까지 뒤척거리기만 하던

껍질 부르튼 내 몸도

지상에서 들어 올려지는 것 같아

 

각시투구꽃 - 김완

 

거창 우두산 가는 길 고견사 입구에서 너를 만났다

낮은 풀숲에 숨어 지나가는 나를 빼꼼히 쳐다보는

보라색 자태가 매혹적이었다 식물도감에

나오는 전형적인 모습이 한눈에 쏘옥 들어왔다

네 모습을 우선 사진기에 담는데 감개가 무량했다

뿌리인 초오는 누군가의 사약으로도 쓰였다

신분의 귀천에 따라 다른 종류의 사약을 썼다니

인간은 죽음 앞에서도 공평하지 못하구나 유명한

너의 이름을 내과 전공의 시작하던 해 처음 알았다

신경통에 좋다고 너의 뿌리를 달여 먹은 후

가슴이 두근거리고 숨을 쉴 수 없어 응급실에 온

환자에서 나타나는 무시무시하고 괴이한 심전도

초오 중독에 의한 부정맥은 잘 알려져 있더구나

심심유곡 홀로 밤을 지새우며 뿌리에 맹독을 키우는

예쁜 척 거짓된 사랑을 비웃으며 절치부심하는 너는

산문 밖 세상에서는 피울 수 없는 풍경 같은 꽃이다

 

빈집 - 성숙옥

 

사람의 온기가 사라진 자리

무심한 들꽃과 새들이 제멋대로 마당을 불리고 있다

지금이면 낮을 일구고

돌아온 발자국이 푸푸 물방울 소리를 채울 텐데

이가 나간 사기그릇 하나 흙을 뒤집어쓰고

서까래까지 해지는 쪽으로 내려앉는다

원추리꽃 위로 떨어지는 뻐꾸기 소리

널브러진 마당을 구른다

되돌아오지 않은 날이 삭아가고

따라가지 못해 수척해진 집

끼니와 끼니를 잇지 못하고

흙을 품은 사금파리에

뾰쪽한 기다림이 글썽거리는 것 같아

나는 뒷걸음질 친다

사람 없이 피는 망초꽃 무리는

계절이 즐거운지

환한 하루를 물고 하늘거리는데

 

 

                                             * 월간 우리20217397호에서

         * 사진 : 여름 꽃들. 차례로 해오라비난초, 감자꽃, 쪽제비싸리, 금낭화, 땅나리, 사랑초, 삼백초, 범부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