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이민화 시 '지독한 사랑' 외 5편

김창집 2021. 8. 9. 00:22

지독한 사랑

 

월요일 아침, 아들의 구두를 닦는다

앞날에 행여 흠집이라도 생길까 봐

할인하는 곳을 피해 사주었던 검정 구두

아픈 친구 이마에 손 얹어봐 줄 줄 알고

남의 말 가로막지 않고 들어줄 줄 아는

따뜻한 사람으로 사춘기 지나기를

잘못된 풍경에 눈 돌리지 말고

언저리에서 맴돌지 않기를

지상에서 가장 간절한 마음 담아

호호 입김 불어가며 구두를 닦는다

 

한쪽으로만 닳은 뒷굽

치열한 열일곱의 길이 보인다

아들의 사춘기가 구두 속에서 꿈을 꾼다

 

플라스틱 아일랜드 - 이민화

 

  배가 불렀지. 그런데 똥이 나오지 않아. 똥을 싼 기억이 없어. 배가 부른데 엄마는 자꾸 먹이를 물어다 내 입에 넣어주며 꿀꺽 삼키라고 그래. 똥을 싸고 싶은데 똥이 나오지 않아.

 

  섬이 떠다닌다. 북태평양 한가운데서 파도를 따라 이리저리 밀려다닌다. 인간들의 이기심이 플라스틱으로 된 섬 하나를 뚝딱 만들었다. 가라앉지 않는, 유령 같은, 자손대대로 물려줘야 할 아픈 유산. 지도에도 없는 영원한 폐허. 바다 밑까지 검은 그림자가 드리우는 그곳에 앨버트로스가 뒤뚱거리며 내려앉는다.

 

  엄마가 물어다준 먹이는 모두 플라스틱이었어. 콜라병뚜껑, 바비 인형의 파란 눈, 햇빛에 쪼개지고 부서진 플라스틱 조각들뿐이었지. 언제나 배가 불렀지만, 똥이 나오지 않았던 거야. 이제야 고백하지만 사실 똥이 마렵지 않았어. 엄마도 아마 알았을 거야. 하지만 어쩔 수 없었겠지. 나는 배부른 채 굶어 죽었어. 엄마는 똥을 잘 싸는지 모르겠어.

 

수신되지 못한

 

안개비가 내린다

김이 지워지고 있다

 

그대에게 보낸 편지 한 통

길을 찾지 못한 채 허공에 흩어지고

그대는 내게서 멀어질수록 더 푸르고

멀뚱멀뚱 태연히 늙어가는 시간

지독한 그리움의 언어는

여전히 전송되지 못한 채

밤새

헤매고

아파하고

뒤척이며

외로움을 더듬는다

 

안개비 내리고

나는 길을 잃었다

 

말년 씨

 

딸만 내리 여덟 낳고 쉰에 아들 하나 얻어

옥이야 금이야 키워 멀리 유학 보냈더니

한 줌 뼛가루 되어 돌아왔다

낮은 담장 아래 공벌레처럼 웅크리고 있다가

라일락꽃그늘에 앉아 웅얼거리는 날 늘더니

말년이 좋아야 인생을 잘 산 거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말년 씨의 말년이

서둘러 깜깜해졌다

낮은 대문에 못질을 한다

 

배고픈 식사

 

콩가루 풀어 넣은 얼갈이 배춧국

단골손님에게만 내놓는다며, 주인은

걸쭉한 입담만큼이나 사발 가득 국을 퍼준다

사발 속에 몽글몽글 맺혀있는 꽃망울

백일 된 내 아기가 게워놓은 흰 젖을 닮아

선뜻 수저를 들 수가 없다

젖꼭지가 헐도록 젖을 빨던 아기는

한동안 똥 싸는 걸 잊은 채

그 작은 입으로 먹은 것을 죄다 토해냈다

아무것도 해줄 수 없어 미안한,

그런 어미를 위로하듯

젖가슴만 파고들던 나약한 봄날이었다

겨울을 견딘 얼갈이배추의 진한 풋내

내 아기의 푸른똥 냄새가 난다

애써 외면했던 시간을 열고

비쩍 말랐던 젖이 핑그르르 돈다

 

내 아기가 게워놓은 한 무더기의 봄

수저를 들 수가 없다

 

여자, 안녕

 

입춘 지나자

폭죽 터지듯 벚꽃 피더니

꽃 진 자리 온통 초록물 드는데

열다섯에 열렸던 내 몸이 닫히네

 

나를 여자이게 했고

나를 여자로 살게 해준 꽃

비린내를 풍기며 달마다 붉게 붉게 피우던 꽃

 

화장실 수납장에 쓰다만 개짐

몇 달째 꽃을 기다리네

혹여 허공에 대고 펑펑 꽃을 피울까 봐

기별 없이 오는 반가운 손님처럼 느닷없이 올까 봐

버리지도 못하네

 

이제 여자, 안녕

 

 

                                  *: 이민화 시집 오래된 잠(황금알, 2017)에서

                                              *사진 : 해녀콩(수채화 효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