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섬
바다를 향向해 앉으면
이름 없는 섬이네.
수평선水平線 저 켠
물소리에 귀 기울이다
밤이면
작은 불 켜고
홀로 참는 섬이네
♧ 굴뚝새
당초 너의 길은
낮은 데로 뚫렸어라
흉흉한 돌담뿌리
해거름이 서러운 날
채석장
아득히 오는
정釘소리로 우는 새야.
살아도 막장 같은
굴뚝이나 후비는 짓
대쪽 같은 목소리
담벼락에 찢겨나고
피맺힌
시어詩語만 흘리는
날개짓 그 행적이여.
한 생애 절반쯤은
누명 쓰고 사는 세상
시인詩人은 언제부터
굴뚝새를 닮았던가
추녀 밑
배고픈 일월日月에
돌이끼만 쪼아라.
♧ 감나무
단풍 한 잎에도
곱게 늙는 법이 있다지.
박토 위 한 생애를
순한 빛만 추스리며
가난도
정情으로 달래던
내 유년의 감나무야.
때로는 그 고집이
감잎 따라 물이 들고
토종감 정수리에
검버섯도 필쯤 해서
촌로村老는
노을을 향向해
빈 지게를 내리는가.
천년을 느껴 흐르던
조선 땅 그 강江빛만치
어버이 먼 심려가
탈삽脫澁*되어 머무는 자리
이승의
종언終言만 같은
한 톨 감이 붉게 탄다.
---
*탈삽 : 감의 떫은맛이 빠짐.
♧ 진눈깨비
1
파지破紙된 이야기들이
포도 위에 지고 있다
교차로 신호등 앞을
서성이는 삶 언저리
기성화旣成靴
낡은 뒤축에
삐걱이는 일상日常이여.
2
어느새 희끗 희끗
새치 솟는 머리칼에
눈도 비도 아닌
눈물 점 점 맺힐 무렵
그대 먼
기약의 지평地平엔
노을 강江이 흐르네.
3
절반 쯤 사노라면
사는 것이 죄罪만 같고
빗금치는 눈비 앞에
우산 들기 송구한 날
마흔 셋
더딘 귀가길
속이 젖는 사람아.
♧ 민달팽이의 시詩
다 벗고 산다 해도
갈 길이사 가야하리.
울 밑을 빠져 나와
결식缺食하던 그 날부터
남도 땅
노숙露宿의 별이
수국꽃잎에 뜨더란다.
돌이 우는 밤이면
가슴에 지는 빗소리
떨어진 발가락 하나
풀꽃 아래 묻어두고
문둥이
눈 먼 문둥이
그 천형天刑을 끌며 간다.
빈자貧者의 야행夜行길은
혼자일 때 더디는가
한 치 앞 예감으로도
저승길 같은 유배流配의 땅
오늘은
뉘 빗돌에 숨어
육필肉筆 한 획 긋고 가리.
*고정국 시집 『진눈깨비』(도서출판 서울, 1990)에서
*굴뚝새 사진은 '다음카페 여행등산야생화사진'의 공수거 백영찬 님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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