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고정국 시집 '진눈깨비'의 시(1)

김창집 2021. 8. 24. 01:05

 

바다를 향해 앉으면

이름 없는 섬이네.

 

수평선水平線 저 켠

물소리에 귀 기울이다

 

밤이면

작은 불 켜고

홀로 참는 섬이네

 

굴뚝새

 

당초 너의 길은

낮은 데로 뚫렸어라

 

흉흉한 돌담뿌리

해거름이 서러운 날

 

채석장

아득히 오는

소리로 우는 새야.

 

 

살아도 막장 같은

굴뚝이나 후비는 짓

 

대쪽 같은 목소리

담벼락에 찢겨나고

 

피맺힌

시어詩語만 흘리는

날개짓 그 행적이여.

 

 

한 생애 절반쯤은

누명 쓰고 사는 세상

 

시인詩人은 언제부터

굴뚝새를 닮았던가

 

추녀 밑

배고픈 일월日月

돌이끼만 쪼아라.

 

감나무

 

단풍 한 잎에도

곱게 늙는 법이 있다지.

 

박토 위 한 생애를

순한 빛만 추스리며

 

가난도

으로 달래던

내 유년의 감나무야.

 

 

때로는 그 고집이

감잎 따라 물이 들고

 

토종감 정수리에

검버섯도 필쯤 해서

 

촌로村老

노을을 향

빈 지게를 내리는가.

 

 

천년을 느껴 흐르던

조선 땅 그 강빛만치

 

어버이 먼 심려가

탈삽脫澁*되어 머무는 자리

 

이승의

종언終言만 같은

한 톨 감이 붉게 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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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삽 : 감의 떫은맛이 빠짐.

 

진눈깨비

 

1

파지破紙된 이야기들이

포도 위에 지고 있다

 

교차로 신호등 앞을

서성이는 삶 언저리

 

기성화旣成靴

낡은 뒤축에

삐걱이는 일상日常이여.

 

 

2

어느새 희끗 희끗

새치 솟는 머리칼에

 

눈도 비도 아닌

눈물 점 점 맺힐 무렵

 

그대 먼

기약의 지평地平

노을 강이 흐르네.

 

 

3

절반 쯤 사노라면

사는 것이 죄만 같고

 

빗금치는 눈비 앞에

우산 들기 송구한 날

 

마흔 셋

더딘 귀가길

속이 젖는 사람아.

 

민달팽이의 시

 

다 벗고 산다 해도

갈 길이사 가야하리.

 

울 밑을 빠져 나와

결식缺食하던 그 날부터

 

남도 땅

노숙露宿의 별이

수국꽃잎에 뜨더란다.

 

 

돌이 우는 밤이면

가슴에 지는 빗소리

 

떨어진 발가락 하나

풀꽃 아래 묻어두고

 

문둥이

눈 먼 문둥이

그 천형天刑을 끌며 간다.

 

 

빈자貧者의 야행夜行길은

혼자일 때 더디는가

 

한 치 앞 예감으로도

저승길 같은 유배流配의 땅

 

오늘은

뉘 빗돌에 숨어

육필肉筆 한 획 긋고 가리.

 

 

                                    *고정국 시집 진눈깨비(도서출판 서울, 1990)에서

                   *굴뚝새 사진은 '다음카페 여행등산야생화사진'의 공수거 백영찬 님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