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를 위하여 – 문충성
너 있음으로 나를 깨우쳐가고 있을 때
전생의 나는 무엇이었을까 슬픔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후생의 나는 무엇일까 기쁨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현생의 나는 무엇일까 고통일까
꿈일가 나는 꿈꾸기로 했다 눈도 귀도 코도 입도 없는
고뇌를 그것이 전생이며 후생임을
그 깊이는 얼마나 될까 깊이의 꿈
전생에서 후생까지 현생을 날아다니는 새여
나는 꿈을 파괴하기로 했다 그 꿈의 깊이 재어
부재의 두레박으로 이 세상의 옷과 밥과 잠
눈물을 길어 올리기로 했다 부질없음을
지는 해
저무는 바다를
♧ 작별作別
누구일까 찾는 이 있다면 이어도에 갔다 하라
불씨 하나 얻으러
50여 년 동안
간직해온 꿈의 불씨
이미 꺼졌도다 누더기 그리움이여
허무의 불 담는 그릇 들고
눈물조차 메말라든 길 따라
길을 지우며 눈보라 속 어정어정
갔다 하라 삔 발목 절룩이며
불 꺼진 집 영하로 얼어붙어
누구일까 찾는 이 없겠지만
그림자까지 차곡차곡
접어놓고 떠났다 하라
내가 사랑한 이 세상에서
만났던 놀라움, 슬픔, 번뇌 그리고 허망함
눈보라 속을
빈 몸 하나 캄캄하게
♧ 절망을 위하여
헛된 행복 뒤에 오는 기쁨을 믿지 말라
하루가 가고 한 달이 지나
보아라 기쁨은 우리를 그냥 두지 않는다
갈가리 찢어놓으니 우리의 그리움
비참하게 고뇌의 벼랑으로 떨어지는
끝에 매달려 힘 못 쓰는 우리들아
결코 눈감지 말라
마침내 망각의 강물에 떨어져 그 강물
아무리 깊어도 미련하게 익사하지 말라
강물의 깊이는 원래 흘러감으로 없는 것이다
만남과 헤어짐의 부질없음이여 속임수, 사랑,
미움, 간교함, 자기기만으로 더 거세어진 강물에서
숨막히며 허우적거리다 거의거의 살아나면
삶과 죽음의 없음 깨달을 때
우리에겐 꿈꿀 게 과연 없는 것일까
비로소 우리들아
두 하늘 가득 차오는 달콤한 절망 꿈꾸게 될
그날은?
♧ 달빛 소리에 대하여
오랫동안 책 세상 속에서도
달빛이 없었구나 고작 베를렌의 ‘달빛’이거나
드뷔시의 ‘달빛’이거나 프랑스 달빛 소리만 즐겨 들었다
배고프던 시절 그토록 죽어 가는 달빛은 아름다웠는데
그래 보리밭 하나 풋풋이 넘쳐나던 달빛이거나
임자 없는 동네 묘지에 그득 쏟아져 내리던 달빛이거나
얼굴조차 모르는 할아버지 제사 먹고 돌아올 때
조그만 발길에 밟혀 파랗게 자빠지던 달빛이거나
무더위 식히려 산보 가던 제주시 서부두
바닷물결에 하얗게 출렁이던 달빛이거나
내 달빛은 어디에 있지?
언제 다 잃어버렸지? 내 유년
잃어버린 것인가? 잊어버린 것인가?
11월 기우는 달 훔쳐보며 달빛 소리를 듣는다
내 발길에 짓밟혀 죽어 가는
누구의 달빛일까 끼익끼익
♧ 내 꿈속의 가장 슬픈 풍경 - 문충성
비틀거리다 비틀비틀
푸르름에 흘러
아득함으로
아득함에 취해 푸르르고
푸르름 속을 날아가는
노래 잃은 새 한 마리 바라보느니
사랑조차 사라져 가는 시대
시공이 허물어져
백지장처럼
비어 가는
너와 나 사이
갈 곳 없어 별 수 없이
비천하게 살아남아
♧ 어느새
무정세월 자근자근
되새김질하다 보면
어찔어찔
어느새
진노란 가을빛
뼛속 깊숙이
날아오르건만
* 문충성 시집 『바닷가에서 보낸 한 철』 (문학과 지성사, 1997)에서
* 사진 : 계곡과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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