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문태준 시집 '가재미'의 시들(1)

김창집 2021. 8. 25. 00:45

 사모思慕

    -물의 안쪽

 

바퀴가 굴러간다고 할 수밖에

어디로든 갈 것 같은 물렁물렁한 바퀴

무릎은 있으나 물의 몸에는 뼈가 없네 뼈가 없으니

물소리를 맛있게 먹을 때 이는 감추시게

물의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네

미끌미끌한 물의 속살 속으로

물을 열고 들어가 물을 닫고

하나의 돌같이 내 몸이 젖네

귀도 눈도 만지는 손도 혀도 사라지네

물속까지 들어오는 여린 볕처럼 살다 갔으면

물비늘처럼 그대 눈빛에 잠시 어리다 갔으면

내가 예전엔 한번도 만져보지 못했던

낮고 부드럽고 움직이는 고요

 

슬픈 샘이 하나 있다 - 문태준

 

맹꽁이가 운다

비를 두 손으로 받아 모으는 늦여름 밤

맹꽁이는 울음 주머니에서 물을 퍼내는 밑이 불룩한 바가지를 가졌다

 

나는 내가 가진 황홀한 폐허를 생각한다

젖었다 마른 벽처럼 마르는

흉측한 웅덩이

 

가슴 속에 저런 슬픈 샘이 하나 있다

 

덤불 - 문태준

 

들찔레 가지에 새잎 돋아 덤불 한 감에 푸른 잎물이 번진다

 

들찔레 가지에 새잎 돋아도 엉킨 내 뜻이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나의 팔에 팔을 손목에 손목을 굴곡屈曲에 굴곡을 한 획에 한 획을 가필해

 

나의 덤불은 육체는 부끄러움 없이 가을날까지 휘고 번진다

 

나는 오늘이 더 큰 참혹함을 부를 뿐이오나

 

새봄이 오면 나는 또 잊는다, 내 가슴 속 거대한 난필亂筆

 

바닥

 

가을에는 바닥이 잘 보인다

그대를 사랑했으나 다 옛일이 되었다

나는 홀로 의자에 앉아

산 밑 뒤뜰에 가랑잎 지는 걸 보고 있다

우수수 떨어지는 가랑잎

바람이 있고 나는 눈을 감는다

떨어지는 가랑잎이

아직 매달린 가랑잎에게

그대가 나에게

몸이 몸을 만질 때

숨결이 숨결을 스칠 때

스쳐서 비로소 생겨나는 소리

그대가 나를 받아주었듯

누군가 받아주어서 생겨나는 소리

가랑잎이 지는데

땅바닥이 받아주는 굵은 빗소리 같다

후두둑 후두둑 듣는 빗소리가

공중에 무수히 생겨난다

저 소리를 사랑한 적이 있다

그러나 다 옛일이 되었다

가을에는 공중에도 바닥이 있다

 

저수지

 

저수지는 하나의

회문回文

 

물빛을 가진 짐승이 꼬리를 물고 구부려 오래 누워 있다

 

여러 겹

느슨하게,

 

일어서본 기억이 없다

 

산도 와서 눕는다

이 병을 받듯

물빛이 산빛을 받아서

 

넘어가본 기억이 없다

산빛이 차도 넘치지 않듯이

 

먼 길을 돌고 돌아가 만나는,

마음이 누운 자리

 

내가 돌아설 때

 

  내가 당신에게서 돌아설 때가 있었으니

 

  무논에 들어가 걸음을 옮기며 되돌아보니 내 발자국 뗀 자리 몸을 부풀렸던 흙물이 느리고 느리게 수많은 어깨를 들썩이며 가라앉으며 아, 그리하여 다시 중심을 잡는 것이었다

 

  이 무거운 속도는, 글썽임은 서로에게 사무친다고 할 수밖에 없다

 

 

                                   * : 문태준 시집 가재미(문학과지성사, 2006)에서

                                                          * 사진 : 금강아지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