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모思慕
-물의 안쪽
바퀴가 굴러간다고 할 수밖에
어디로든 갈 것 같은 물렁물렁한 바퀴
무릎은 있으나 물의 몸에는 뼈가 없네 뼈가 없으니
물소리를 맛있게 먹을 때 이齒는 감추시게
물의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네
미끌미끌한 물의 속살 속으로
물을 열고 들어가 물을 닫고
하나의 돌같이 내 몸이 젖네
귀도 눈도 만지는 손도 혀도 사라지네
물속까지 들어오는 여린 볕처럼 살다 갔으면
물비늘처럼 그대 눈빛에 잠시 어리다 갔으면
내가 예전엔 한번도 만져보지 못했던
낮고 부드럽고 움직이는 고요
♧ 슬픈 샘이 하나 있다 - 문태준
맹꽁이가 운다
비를 두 손으로 받아 모으는 늦여름 밤
맹꽁이는 울음 주머니에서 물을 퍼내는 밑이 불룩한 바가지를 가졌다
나는 내가 가진 황홀한 폐허를 생각한다
젖었다 마른 벽처럼 마르는
흉측한 웅덩이
가슴 속에 저런 슬픈 샘이 하나 있다
♧ 덤불 - 문태준
들찔레 가지에 새잎 돋아 덤불 한 감에 푸른 잎물이 번진다
들찔레 가지에 새잎 돋아도 엉킨 내 뜻이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나의 팔에 팔을 손목에 손목을 굴곡屈曲에 굴곡을 한 획에 한 획을 가필해
나의 덤불은 육체는 부끄러움 없이 가을날까지 휘고 번진다
나는 오늘이 더 큰 참혹함을 부를 뿐이오나
새봄이 오면 나는 또 잊는다, 내 가슴 속 거대한 난필亂筆을
♧ 바닥
가을에는 바닥이 잘 보인다
그대를 사랑했으나 다 옛일이 되었다
나는 홀로 의자에 앉아
산 밑 뒤뜰에 가랑잎 지는 걸 보고 있다
우수수 떨어지는 가랑잎
바람이 있고 나는 눈을 감는다
떨어지는 가랑잎이
아직 매달린 가랑잎에게
그대가 나에게
몸이 몸을 만질 때
숨결이 숨결을 스칠 때
스쳐서 비로소 생겨나는 소리
그대가 나를 받아주었듯
누군가 받아주어서 생겨나는 소리
가랑잎이 지는데
땅바닥이 받아주는 굵은 빗소리 같다
후두둑 후두둑 듣는 빗소리가
공중에 무수히 생겨난다
저 소리를 사랑한 적이 있다
그러나 다 옛일이 되었다
가을에는 공중에도 바닥이 있다
♧ 저수지
저수지는 하나의
회문回文
물빛을 가진 짐승이 꼬리를 물고 구부려 오래 누워 있다
여러 겹
느슨하게,
일어서본 기억이 없다
산도 와서 눕는다
병病이 병病을 받듯
물빛이 산빛을 받아서
넘어가본 기억이 없다
산빛이 차도 넘치지 않듯이
먼 길을 돌고 돌아가 만나는,
마음이 누운 자리
♧ 내가 돌아설 때
내가 당신에게서 돌아설 때가 있었으니
무논에 들어가 걸음을 옮기며 되돌아보니 내 발자국 뗀 자리 몸을 부풀렸던 흙물이 느리고 느리게 수많은 어깨를 들썩이며 가라앉으며 아, 그리하여 다시 중심을 잡는 것이었다
이 무거운 속도는, 글썽임은 서로에게 사무친다고 할 수밖에 없다
* 시 : 문태준 시집 『가재미』 (문학과지성사, 2006)에서
* 사진 : 금강아지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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