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이 내게 오고 있다
조릿대 사이사이
하늘가는 길을 간다.
오를수록 키 낮추는
시로미 열매 따라
저만치 병풍바위에
푸른 돛을 날리며
종종치는 애기구름
쉬엄쉬엄 바위 등에
산안개 전설 따라
내려오는 설문대할망
비 젖은 나한의 이마에
초록치마 덮으며
흔들리는 여심旅心 곁에
한 그루 주목朱木을 심고
가을 노루샘에
딸아이 무등 태우던
큰 바위 왕관을 쓰고
산이 내게 오고 있다.
♧ 단풍 한 잎
다시 또 이별이네
모른 척 뒤돌아섰네
와지끈 깨문 입술
알기나 하는 듯이
황급히
절명시 한 줄
내 앞에다 흘리네
♧ 문득
세월이 가면 목탁소리도
절로 익는다는
상좌스님 말씀에도
눈 하나 꿈쩍 않던
행자승 서툰 목탁소리
그리움이
묻었다
♧ 밤 매미
가로등빛 만개한 밤을 하얗게 새고 있다
팔뚝 옹이마다 아프게 껍질을 깨고
어둠 속 삶의 흔적을 땅 위에다 펼치며
연륜이 짧은 만큼 목소리가 커졌구나
낮 동안 못다 이룬, 그래 사랑은 지금이야
마지막 밤의 찬가에 뒤척이는 여름 밤
♧ 만수
수만 번 이별 앞에
몰래몰래 깊어진
삼백 밀리 폭우에도
꿈쩍 않던 수문을
말복쯤 통첩을 두고
홀로 잔을
비운다
♧ 주행일지
백색 추월선이 차창 앞으로 풀리면서 중, 저속 와이퍼 너머 안개 속으로 묻히는 길 줄줄이 포승이 묶인 채 깜박이를 켜댄다.
숲길은 비밀투성이 주의보가 내려지고 과속감지 카메라 앞에 숨죽이는 경차처럼 무채색 파스텔 한 점 길속으로 또 묻혀.
아픈 날 내 몫으로 한 칸 여백을 남겨 두던 길은 오늘따라 온 것만큼 또 멀어져 성판악 휴게소 간판이 이국처럼 낯설다.
숲 터널 졸참나무가 잿빛의 비옷을 벗는 긴 꼬리 비틀거리던 수악교 커브를 돌면 와! 저기 섬들을 잇는 물이랑이 눈부셔.
* 한희정 현대시조 100인선 『도시의 가을 한 잎』(고요아침, 2017)에서
* 사진 : 한라산 산조(수채화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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