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한희정 시조집 '도시의 가을 한 잎'에서

김창집 2021. 8. 28. 11:20

산이 내게 오고 있다

 

조릿대 사이사이

하늘가는 길을 간다.

 

오를수록 키 낮추는

시로미 열매 따라

 

저만치 병풍바위에

푸른 돛을 날리며

 

 

종종치는 애기구름

쉬엄쉬엄 바위 등에

 

산안개 전설 따라

내려오는 설문대할망

 

비 젖은 나한의 이마에

초록치마 덮으며

 

 

흔들리는 여심旅心 곁에

한 그루 주목朱木을 심고

 

가을 노루샘에

딸아이 무등 태우던

 

큰 바위 왕관을 쓰고

산이 내게 오고 있다.

 

단풍 한 잎

 

다시 또 이별이네

 

모른 척 뒤돌아섰네

 

 

와지끈 깨문 입술

 

알기나 하는 듯이

 

 

황급히

 

절명시 한 줄

 

내 앞에다 흘리네

 

문득

 

세월이 가면 목탁소리도

 

절로 익는다는

 

상좌스님 말씀에도

 

눈 하나 꿈쩍 않던

 

행자승 서툰 목탁소리

 

그리움이

 

묻었다

 

밤 매미

 

가로등빛 만개한 밤을 하얗게 새고 있다

 

팔뚝 옹이마다 아프게 껍질을 깨고

 

어둠 속 삶의 흔적을 땅 위에다 펼치며

 

연륜이 짧은 만큼 목소리가 커졌구나

 

낮 동안 못다 이룬, 그래 사랑은 지금이야

 

마지막 밤의 찬가에 뒤척이는 여름 밤

 

만수

 

수만 번 이별 앞에

 

몰래몰래 깊어진

 

삼백 밀리 폭우에도

 

꿈쩍 않던 수문을

 

 

말복쯤 통첩을 두고

 

홀로 잔을

 

비운다

 

주행일지

 

  백색 추월선이 차창 앞으로 풀리면서 중, 저속 와이퍼 너머 안개 속으로 묻히는 길 줄줄이 포승이 묶인 채 깜박이를 켜댄다.

 

  숲길은 비밀투성이 주의보가 내려지고 과속감지 카메라 앞에 숨죽이는 경차처럼 무채색 파스텔 한 점 길속으로 또 묻혀.

 

  아픈 날 내 몫으로 한 칸 여백을 남겨 두던 길은 오늘따라 온 것만큼 또 멀어져 성판악 휴게소 간판이 이국처럼 낯설다.

 

  숲 터널 졸참나무가 잿빛의 비옷을 벗는 긴 꼬리 비틀거리던 수악교 커브를 돌면 와! 저기 섬들을 잇는 물이랑이 눈부셔.

 

 

                           * 한희정 현대시조 100인선 도시의 가을 한 잎(고요아침, 2017)에서

                                                 * 사진 : 한라산 산조(수채화 효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