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고영숙 시집 '나를 낳아주세요'의 시(3)

김창집 2021. 12. 7. 00:04

 

 

운명도감을 펼치다

 

  삼재三災를 지나고 있어 철학관 족자에 내걸린 지천명 창밖 배롱나무 낭창낭창 딴전을 피우는 사이 죽은 나무가 작정하고 산 나무를 뒤집을지 몰라 때론 흘림체로 써 내려가는 내일, 하늘과 땅 사이 숨어 있던 침묵을 깨울지도 몰라 내 뒤를 지켜줄 운명의 역주행 붉은 부적이 삼천 배를 휘갈기며 날뛰는 파도를 잠재울지도 모르지 자식새끼 다 착하니 그것도 니 복이다 수리부엉이 같은 입으로 자꾸 물어다 주는 사주팔자, 운명의 굴레가 투명한 칼날에 잘려나갈지도 모르지

 

 

부르튼 설화도舌話圖

 

꽃이 피기 전

낯선 속내를 뜨겁게 쏟아내던

돋을새김으로 새겨진 구내염 문체

말라죽은 조사弔詞들이 뚝뚝 떨어진다

몸은 아픈 최후

발음은 무뎌지고

부풀어 오른 입안의 점막 사이

붉은 테두리를 뚫고

살아있다고

언저리마다 함부로 피어나는 당신

언제나 싱싱했던 비문碑文

여릿여릿 혀에 피는 층층의 그을음

울컥 터지는 첫 문장

절정이던 당신을 뱉어내면

천 개로 갈라지는 통증

혹은 후회

 

 

옆구리에 누운 달

 

  나부끼는 옷자락 사이

  그대 아직 살아있다는 소문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누워 있던 달빛 뒤척이며 쓸쓸히 일어서 우물에 수장된 그리움 꽃잎으로 덮을까나 본디 달의 그림자는 세 개, 나 그대 몸을 가졌고 그대 내 그림자 가졌으니 첫 그림자는 놓고 가라 눈 감고 가라 연푸른 자색 피돌기가 시작되면 그대 돌아올까나 올까나 허공에 떠 있는 어긋난 시공간, 천년 달빛을 탐하였으나 쓰다듬지 못하는 눈썹 저녁, 그리운 혓바늘 다시 돋을까나 그대 허리 껴안고 동서남북 춤을 출까나 자잘한 꽃망울들 무수히 피고 지고 첫 보름이면 달을 낳으리 하얀 피를 쏟은 죄, 나를 무너뜨린 죄, 살아 있으라 살아 있으라 내가 읽은 게 꽃잎이었는지 달빛 한 줌이었는지 끝내 읽지 못하는 오랜 내력, 돌고 도는 신열처럼 달아오르는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훤한 이마 끌어안고

  그대 아직 살아 있다는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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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가요 정읍사의 후렴구.

 

 

다산茶山을 필사하다

 

밑줄 친 대목마다 그믐달이 걸리는 밤

흐린 달빛으로 다산을 필사한다

새어든 바람이 펼쳐놓은 두꺼운 국문학사

강골한 풀들이 무성히 돋아난다

도포자락에 달라붙은 먼지를 털고

흘림체 서찰을 읽는다

탕자나무 울타리에 둘러싸여 휘어진 첫 문장부터

간격을 두고 차례로 무너져 내린다

수없이 피고 졌을 글

결박당한 탱자꽃들

남도로 떠나는 유배행렬을 닮은 서늘한 붓 자국

가슴에 그어대는

한 획 한 획 벼락이 지더니

홰를 치는 새벽

남루한 절창 하나 먹울음 운다

 

 

달맞이꽃 연대기

 

  내 몸의 그림자는 오래된 달의 신전과 겹친다 하자 보수 기간을 몇 년이나 넘긴 몸의 화석, 통과의례처럼 온몸이 욱신욱신 쑤시더니 꽃심 기둥 구석구석 금이 간다 한 생애를 버티고 서 있던 조용한 뼈들의 반란, 달빛들은 서로 부딪치고 시간의 발자국은 밤을 가로질러 온다 한때는 시퍼렇게 날이 선 모서리가 둥그렇게 닳아질 무렵, 물살을 거슬러 꽃잎들이 뼈를 맞추는 시간, 굽어버린 등뼈가 정점을 찍으면 녹슨 신전이 허물어져 내린다 꽃심이 힘없이 떨어져 나갈 마지막 유예, 지루한 권태를 나르고 부지런히 검은 뼈들을 나른다 갱년기, 꽃들이 건너온 자리 결 고운 달맞이꽃이 붉은 문에 꽃물이 스미도록 헌자 그 강을 건너고 있다

 

 

              * 고영숙 시집 나를 낳아주세요(리토피아, 2021)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