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건천 2
메마른 가슴은 접어두기
언제 올지 모를 그대를 위해
넉넉한
가슴으로 맞이하기 위해
오늘
목마름을 굳게굳게 참기
행여 넘쳐버릴 그대 사랑을
모두 받아들이기 위하여
오늘 목마름을 굳게 참아
넓은 가슴으로 살아가기
♧ 다랑쉬굴
-토끼
소리가
모두를 죽음에 이르게 할 뿐
도망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음을
알아차린 그 날 이후로
토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아기가 울면 입을 막았을 뿐
총탄이 날아오고
매캐한 연기가
온몸을 휘감아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토끼들처럼
굴속에서 허연 백골이 되도록
꾹꾹 참았다
살려달란 외침이 부질없음을 알기에
소리를 버린 해골들
수 십 년 동안 앙다문 턱이 허옇게 부서졌다
♧ 살아남기 2
-개미와 베짱이
개미는
아침부터 밤늦도록
어영차 기여차 죽을 둥 살 둥
오늘 일해 집 한 채 살까?
자식 학교는 보낼 수 있을까?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영차영차
베짱이는
오늘도 띵가띵가
봄부터 겨울까지 띵가띵가
바람 불면 집 안에서
날 좋으면 야외에서 띵가띵가
집세 받고 레슨비 받고
놀고 있어도 개미 버는 거 다 가져간다
♧ 상처 1
살다 보면 상처가 날 수도 있지
자잘한 상처도 어쩌면 제법 큼직한 상처도
죽지 않고 살아 있어 다행이라 할 그런 상처도
상처는 그냥 두면 곪아 터질 수 있지
소독도 하고 연고도 바르고
가끔은 바늘로 꿰매기도 해야지
오래된 상처라고
그냥 놔두면 살점이 뜯기거나
더럽다고 가려 버리는
그런 잘못을 하지 말고
이제라도 하나하나
흉터마다 약을 바르고
따뜻한 손으로 어루만져 주자
아프지 말게
♧ 아버지 4
-삼중날 전기면도기
그림자 때문에 살이 베일까 무서워요
아버지가 쟁기질해 놓은 밭에서는 허연 수염이 자라요
아버지 허연 수염은 그 골골에서 부족한 아버지의 영양분을
아버지 몫도 안 남기고 뽑아먹고 있네요
그 옛날 도루코 면도날로 까만 잡초를 베어젖히던
아버지 그때 그 기상이 이제 부러워요
젊었던 날 적진을 거침없이 내달리던
관우의 청룡언월도 같은 도루코 날
휘두루던 아버지 주름살에서
피 흘릴까 두려워 조심스레 윙윙거리는
삼중날 전기면도기
♧ 비옵니다 1
-촛불 축제
아들아!
소원을 빌 때는 큰 소리로 하는 거야
달이 저리 높이 있는데
사람들이 다들 자기 소원 비는데
너의 소리가 들리게 하려면
큰 소리가 필요해
달이 구름에 가려 소원을 못 들을 듯하면
사람들은 촛불을 켜서 소원을 빌곤 해
촛불 하나로 약하면 간절함을 같이 모아
수백, 수천, 수만의 촛불을 모아
횃불을 켜는 거야
프로메테우스처럼 고통을 겪는다 해도
진정 인간을 위해 횃불을 사람들의 가슴에
활활 타오르게 하는 거야
* 양동림 시집 『마주 오는 사람을 위해』 (한그루, 2021)에서
* 사진 : 12월의 억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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