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정형무 시집 '닭의장풀은 남보라 물봉선은 붉은보라'의 시(2)

김창집 2021. 12. 8. 01:09

 

미륵사지에서

 

선화공주님 서동과 얼려

죽어도 천년만년 살고지고

 

오늘은 비 맞는 탑파가 두 개

크낙한 몸피가 스스럼없어라

 

청산에 비구름 비껴가고

탑 돌아 다시보자 손가락 걸었던

내 님의 선홍색 방형우산方形雨傘

 

너른 땅 한 마당

은구슬 꿰어 내리는 빗줄기 속에

저 홀로 흥에 겨워 둥둥 떠돌아

 

아소 님하

백년도 못 살 님하

 

서쪽하늘 멀리 던져 버리고

단내 나게 내 품으로 안겨 오소서

 

 

마이산

 

산 개미가 죽은 개미를 물고 가는 여기는

싸리꽃 붉은 암마이봉 꼭대기다

 

이 높은 곳에서도 나비가 날고

하늘은 더디 푸르다

 

무덤가에 타래난초 피어 있어

보랏고 섰다가

 

홍련 벙그는 방죽가에서

유혈목이 한 쌍을 놓아 주었다

 

구름의 고향은 어디일까

아등바등 기어 올라와

 

산 너머 산들을 굽어보며

한 생각이 피고 지는 것을 지켜보고 나서

 

다시 살아갈 맘이 들면

뉘엿한 바위산을 내려갈 터이다

 

 

까마귀

 

갈림길에서 살을 쪼던 까마귀가 짖어댔다 젊어 죽어야 영원할 수 있노라고

 

새까만 까마귀야 너 따위가 칠정七情을 알겠느냐, 훠이 쫓아버리고 말았는데

 

한 세월 건너와 보니 그 말이 맞는 것도 같다. 먼저 간 사람들이 뭉뚝한 부리로 앙가슴을 쫀다, 시도 때도 없이 쿡 쿡 쿡

 

그날이 오면 까마귀 떼 날아와 까옥거릴 텐데, 부서진 나를 물고 흑점을 향해 날아갈 터인데

 

이 몸은 어쩌다 거짓 같은 이생에 왔을까, 몸 없는 마음은 누구 가슴에 머물다 흩어질까

 

까마귀도 이름이 있을까, 까마귀는 까마귀로 영원할진데

 

 

정부

 

외딴 방의 문을 열자

빛줄기 속에서 뛰노는 티끌

 

너 거기 서서

호박색 눈동자로 웃어 보아라

 

어젯밤 최후의 낙숫물이

가엾이 울려 퍼지는 그곳

 

너 갇혀 있어라 감춰진 것들

숨겨져 있어 그윽하나니

 

빗장을 여미는 이 순간부터

나는 살고 너는 죽는다

 

 

겨울산

 

얼음 위 댓잎 자리 보아*

뻣뻣한 다리 하나 슬몃

임의 아랫배에 올리렸더니

 

토끼는 뛰고 장끼는 날아

푸른 산 쩡쩡 울리고 나서

살얼음판 서성이던 노루 한 마리

날렵한 뱃구레를 겅중 솟구쳐

사시나무 숲으로 내빼고 말았네

 

나는 너덜길을 기어올라

가파를 벼랑 끝 인동덩굴을

하늘나라 썩은 동아줄마냥 당겨 보고

 

부러진 솔가지 너머 높은 봉우리더러

몸이 즐거우면 마음도 따르더냐

 

어긔야 어강됴리*

한 소리 질러도 보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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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전춘별사.

*정읍사.

 

 

만추

 

애기단풍 바라보다 말고

내 손 아직 예쁘죠, 불쑥 내미는 손

부챗살 같은 손가락 새로 쓸려가는 해름

 

산그늘 밀려오기 전

가만히 뒤집어보는 가녀린 손등

푸른 핏줄들 힘없이 간당거린다

 

까실한 엽맥을 어루만지자

멋모르는 여자는 얼싸둥둥

, , , 입을 가리고 웃는다

 

내 맘은 서리 내리는데

내 속에 눈보라가 치는데

 

시든 지 오랜 적색왜성赤色矮星 몇 낱

꽃물 빠진 손톱 끝에서 가을은

벌써 낙엽으로 구르고 있다

 

 

        * 정형무 시집 닭의장풀은 남보라 물봉선은 붉은보라(우리, 2021)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