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륵사지에서
선화공주님 서동과 얼려
죽어도 천년만년 살고지고
오늘은 비 맞는 탑파가 두 개
크낙한 몸피가 스스럼없어라
청산에 비구름 비껴가고
탑 돌아 다시보자 손가락 걸었던
내 님의 선홍색 방형우산方形雨傘이
너른 땅 한 마당
은구슬 꿰어 내리는 빗줄기 속에
저 홀로 흥에 겨워 둥둥 떠돌아
아소 님하
백년도 못 살 님하
서쪽하늘 멀리 던져 버리고
단내 나게 내 품으로 안겨 오소서
♧ 마이산
산 개미가 죽은 개미를 물고 가는 여기는
싸리꽃 붉은 암마이봉 꼭대기다
이 높은 곳에서도 나비가 날고
하늘은 더디 푸르다
무덤가에 타래난초 피어 있어
보랏고 섰다가
홍련 벙그는 방죽가에서
유혈목이 한 쌍을 놓아 주었다
구름의 고향은 어디일까
아등바등 기어 올라와
산 너머 산들을 굽어보며
한 생각이 피고 지는 것을 지켜보고 나서
다시 살아갈 맘이 들면
뉘엿한 바위산을 내려갈 터이다
♧ 까마귀
갈림길에서 살을 쪼던 까마귀가 짖어댔다 젊어 죽어야 영원할 수 있노라고
새까만 까마귀야 너 따위가 칠정七情을 알겠느냐, 훠이 쫓아버리고 말았는데
한 세월 건너와 보니 그 말이 맞는 것도 같다. 먼저 간 사람들이 뭉뚝한 부리로 앙가슴을 쫀다, 시도 때도 없이 쿡 쿡 쿡
그날이 오면 까마귀 떼 날아와 까옥거릴 텐데, 부서진 나를 물고 흑점을 향해 날아갈 터인데
이 몸은 어쩌다 거짓 같은 이생에 왔을까, 몸 없는 마음은 누구 가슴에 머물다 흩어질까
까마귀도 이름이 있을까, 까마귀는 까마귀로 영원할진데
♧ 정부
외딴 방의 문을 열자
빛줄기 속에서 뛰노는 티끌
너 거기 서서
호박색 눈동자로 웃어 보아라
어젯밤 최후의 낙숫물이
가엾이 울려 퍼지는 그곳
너 갇혀 있어라 감춰진 것들
숨겨져 있어 그윽하나니
빗장을 여미는 이 순간부터
나는 살고 너는 죽는다
♧ 겨울산
얼음 위 댓잎 자리 보아*
뻣뻣한 다리 하나 슬몃
임의 아랫배에 올리렸더니
토끼는 뛰고 장끼는 날아
푸른 산 쩡쩡 울리고 나서
살얼음판 서성이던 노루 한 마리
날렵한 뱃구레를 겅중 솟구쳐
사시나무 숲으로 내빼고 말았네
나는 너덜길을 기어올라
가파를 벼랑 끝 인동덩굴을
하늘나라 썩은 동아줄마냥 당겨 보고
부러진 솔가지 너머 높은 봉우리더러
몸이 즐거우면 마음도 따르더냐
어긔야 어강됴리*
한 소리 질러도 보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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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전춘별사.
*정읍사.
♧ 만추
애기단풍 바라보다 말고
내 손 아직 예쁘죠, 불쑥 내미는 손
부챗살 같은 손가락 새로 쓸려가는 해름
산그늘 밀려오기 전
가만히 뒤집어보는 가녀린 손등
푸른 핏줄들 힘없이 간당거린다
까실한 엽맥을 어루만지자
멋모르는 여자는 얼싸둥둥
호, 호, 호, 입을 가리고 웃는다
내 맘은 서리 내리는데
내 속에 눈보라가 치는데
시든 지 오랜 적색왜성赤色矮星 몇 낱
꽃물 빠진 손톱 끝에서 가을은
벌써 낙엽으로 구르고 있다
* 정형무 시집 『닭의장풀은 남보라 물봉선은 붉은보라』 (우리詩움, 2021)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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