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각 – 곽은진
생각을 아니하면
잊을 수도 있다는데
자꾸만 떠오르는 건
잊으려는 그 얼굴이네
바쁜 일상에도
문득문득 젖어드는
그리움은 고요한 마음에
돌을 던지네
잊자 생각하면
더욱 생각나니
생각마저 버려야 하네
♧ 한라산 진달래밭에서 - 김용길
(1) 길을 잃다
산머리 앞 진달래밭에서
그만 길을 잃어버렸네
시벌건 멍석 펼쳐놓은 듯
만개한 꽃밭
봄볕 깔린 길
건너다 넘어졌지
바짓가랑이마다 꽃잎 방울 피어나고
꽃물 젖은 신발 털다 말고
우러러보던 천공天空
산이 내려서고
찢어진 구름 몇 송이
삿갓 쓴 채 달아나고.
(2) 이정표
꽃향에 취해 서성거렸네
길은 사라지고
오던 발걸음 되걸어도
볕살 자국만 남고
절뚝거리며 꽃밭 주변을
맴돌았네
이정표 하나 찾기 위해
손바닥 펴고 침방울 튕기며
다시 돌아와 앉은 자리
오, 거기가 바로
이정표 자리였네.
♧ 중도 2 – 오영호
큰 스님,
크고 작음에 기준이 있습니까?
없느니라 여기 세 개의 컵을 보아라 크기가 다 같은가? 다 다릅니다. 중간 컵을 들고 옆에 작은 컵보다 큰가 작은가? 큽니다. 이 큰 컵보다는? 작습니다. 생각해 보거라 제일 작은 컵보다는 두 개가 크고, 제일 큰 컵보다는 두 개가 작지 않느냐? 예. 그렇습니다.
그러니
분별할 수 없지
크다 작다 하지 마라.
♧ 바이러스가 사람을 적중했다 - 윤봉택
대설 지나 사흘에도 하늘이 어둡다.
코로나19로* 세계는 잠이 들고
확진자들은 국경선을 지나
유도등 없는 활주로에서
이륙을 기다리고 있다.
날 선 가지마다 내리는 저녁 빛
대동맥을 지나온 혈류가
삼경을 넘어 모세혈관으로 모이는데,
마비된 정맥으로 길 잃은
지난 기억들이 정낭 밖에서
졸고 있다.
날이 밝으면 빛 따라 흩어질
대지의 어둠도 뒤척이는 시간
심장 박동 소리를 지키는
대숲에서
죽순 오르는 하늘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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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병관리청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국내 발생 현황 2020년 12월 13일 0시 기준으로, 국내 발생 신규 확진자는 1,002명이 확인되었고, 해외 유입 사례는 28명이 확인되어 총 누적 확진자 수는 42,766명(해외 유입 4,892명)
♧ 봉려관 스님 - 이창선
해월당 안봉려관 탄신 150회
신축년 일곱 돌 맞아 꽃핀 신행수기
뜨거운 불심이 살아
해월굴*을 밝힌다.
중생은 부처님의 가르침 깨달은 듯
미물도 귀의하면, 공덕을 쌓아 올리듯
스님도 사바세계를 품고
석상으로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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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종 제23교구 관음사 경내에 있는 작은 굴, 봉려관 스님은 관음사 창건하기 전 이곳에서 수행정진함
♧ 관음사의 돌부처 – 강태훈
산사의 도량에 봄은 깊어
돌부처의 넉넉한 얼굴에도
미풍이 조을고
백목련 가지마다
꽃봉오리 벙글어졌구나
기도 삼매에 들었는가
늙은 보살의 등 뒤로
생로병사가
아지랑이처럼 스쳐간다
눈 여린 할멈이
바늘에 실 꿰듯
기도는 일념으로 간구하는 것
구릉마다 곱게 핀 야생화의 군락
노거수 아래에서 명상하듯
돌부처와 마주 앉아 웃고 있네
* 혜향 문학회 간 『혜향문학』 (혜향 제17호, 2021)에서
* 사진 : 제주 관음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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