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밥심
간밤
비바람에 벚꽃들 산화(散花)하다
하르르 꽃잎 날리면서
봄날 몇 밤 화려하게 불 밝히더니
오늘은 흐린 날 인상처럼
구죽죽이 처참한 몰골이다
잔해의 풍경 사이로
밥튀기나무 오롯이 붉다
비바람 거세게 몰아쳤어도
볼따구니에 다닥다닥 붙은 밥티 꽃잎
외려 흐린 세상 은은히 불 밝히다
어린 날 끼니 거를 적
내 어머니 눈물로 먹여주던 그 밥 알갱이들
이리 벅차다
삶이 아무리 힘겨워도
사람은 밥심으로 사는 것이라고
어머니 당신 밥그릇 덜어가며 말씀 하셨지
스산한 봄날 밥튀기나무 찬연한 꽃잎 바라보면
나를 살린 밥심이
어머니 눈물로 버무린 사랑이었음을
새삼 알겠네
♧ 마음의 죽(粥)
겨울나무 마른 가지 위에
헐벗은 마음 매달아
매서운 바람도 쓸려 보내고
더러는 슬프게 내려앉는
눈송이 몇 개도 머물게 하여
한기 하나로 이 세상
보고자 했거니
마음은 어느덧 손가락마다
잎 달고 간간히 비치는
햇살 감싸 안으며
고개를 내미는구나
요놈! 마음아 게 섰거라
매질을 하고 등덜미 낚아채도
마음은 움켜잡은 손가락 사이
빠져나가는 물인가
대책 없이 배롱거리며
무한천공 날아오르는구나
♧ 초파일
햇살 부시다
일곱 살 배앓이 할 때
햇살 잘 드는 툇마루 앉아 어린 나를
당신 무릎에 눕히시곤
천수경 읊조리며 배 쓰다듬던
어머니 손길 같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저
어머니 독경 따라
새 새끼처럼 나무아비타불
나무아비타불 암송하곤 했었지
부처님 손길이
어디 따로 있었겠나
부처님 오신 날
저세상 계신 어머니 손길이 저리도 따스하다
♧ 폭포
나를 어떤 정신으로 규정짓지 말라
난들 유연한 몸짓으로 부드럽게 흐르고 싶지 않았으랴
산들바람 불면 산들바람으로
달빛 내려앉으면 달빛 쟁쟁이며
나나들이로 한 생을 구가하고 싶지 않았으랴
한 생의 굽이굽이 흐르다 보면
때로 어둠의 이빨에 뜯기기도 하고
또 자주 덫에 치여 제 모습을 유지하기도 힘들 터
누군들 상처를 훈장처럼 간직하고 싶었겠나
결코 지워서는 안될 가슴속 붉은 표식
그것 하나 겨우 증명하려 할 뿐이니
오늘 내가 천 길 벼랑 아래
짐승처럼 온몸의 내장을 쏟아붓는 이유인 것이다
♧ 가자, 우리 그리운 숲으로
그리움 하나로 눈뜨는 숲이 있다
차운 눈발조차도 부드러이 잎새들에 스며들고
눈 비비며 깨어나는 멧새들의 날개 치는
소리에 아침 하늘 환하게 열리는
정정한 도끼날에도 순은의 햇살은 빛나고
우리 옛적 저고리에 밴 땀방울도
오직 사랑으로 일구어가는
청솔 그루터기마다 눈매 고운
웃음들이 넉넉히 자리하여
사람과 사람, 나무와 새 새끼들이 적의와 굴욕 없이도
한세상 푸짐하게 껴안는
그리움 하나로 빛나는 숲이 있다
빈 들판에서 가축들 느리게 돌아오고
손길 주지 않아도 산나리들 무더기로 피어나
따로 희망의 약속 부질없는
저녁연기 속으로 지친 그림자들
안개처럼 녹아들고 억센 근육으로
새큼새큼 건강한 성(性) 피워내는
그리움 하나로 눈뜨는 숲이 있다
꾸미지 않아도 시가 항아리로 익어가고
생명이 생명으로만 타오르는 곳
그대여, 우리 그 숲으로 가자
그리하여 우리 태초에 지닌 맨살로
껴안고 살 부비며 덩실덩실 춤이나 추자
산 같은 그리움으로 한세상
맛있게 맛있게 꽃을 피우자
* 김승립 시집 『벌레 한 마리의 시』 (삶창시선, 2021)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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