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억새꽃
선생의 모습은 언제나 늦가을이다
서늘한 바람이 익숙한 길을 돌 때
헤싱헤싱한 머리칼 위로
둥그러니 달그림자가 떴다
먼 길 걸어온 바짓가랑이에
달관과 체념이 헐겁게 휘감겨
누렇게 흙빛 물이 들어도
노장老壯의 길은 쉼이 없구나
빈 하늘 빛 어딘가 먼 자리에는
낮별이 숨어 빛나리니
하얗게 일렁이는 억새 파도에서
세월의 노래를 들어라
♧ 소라게
누군가는
달팽이의 우아함을
노래하지만
누군가는
소라게처럼 살기도 한다
허름한 집에
작은 구들 들이고
마음 졸이며
들락날락
♧ 함박눈
눈이 내린다
내려놓으려고
무거운 마음 내려놓으려고
눈이 내린다
괜찮다고
다 괜찮다고
오늘은 좀 쉬겠다고
눈이 내린다
누워 하늘을 쳐다보겠다고
하염없이
하염없이 바라보겠다고
눈이 내린다
♧ 봄
봄은 폐허를 뚫고 온다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마른 껍질을 깨고 나오는 난생의 파충류처럼
봄은 망각 속에서 온다
가까운 겨울, 그 너머의 아득한 계절들도
마치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처럼
봄은 천진한 생명으로 온다
모든 그늘과 죽음들을 외면하며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러니 봄이여 오라
폭풍처럼 오라, 빅뱅이 일어나듯
난바다의 파도처럼 한 번에 밀려오라
♧ 미련
괜히 왔다 간다
뭐 볼 것 있다고
분꽃 다 진 어스름 빈집
능소화 줄기 너머로 기웃기웃
초여름 저녁 별 하나
♧ 우두커니
다시 가을이 가까워졌다
내 생애에 몇 번째인가
헤어지고 영영 못 만나는 것들이 늘었다
지키지 못한 언약도 쌓였다
풀잎들이 지워진 산등성이마다
우두커니 비워진 무덤들
하늘이 하얗게 넓어졌다
일찍 떨어진 잎들은 실금만 남았다
내 생애에 다시 몇 번째인가
바람이 낙엽 밟아 오는 소리 듣는다
*진하 시집 『제웅의 노래』 (시작시인선 0394, 2021)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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