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진하 시집 '제웅의 노래'의 시(3)

김창집 2021. 12. 12. 00:55

 

 

억새꽃

 

선생의 모습은 언제나 늦가을이다

서늘한 바람이 익숙한 길을 돌 때

헤싱헤싱한 머리칼 위로

둥그러니 달그림자가 떴다

 

먼 길 걸어온 바짓가랑이에

달관과 체념이 헐겁게 휘감겨

누렇게 흙빛 물이 들어도

노장老壯의 길은 쉼이 없구나

 

빈 하늘 빛 어딘가 먼 자리에는

낮별이 숨어 빛나리니

하얗게 일렁이는 억새 파도에서

세월의 노래를 들어라

 

 

소라게

 

누군가는

달팽이의 우아함을

노래하지만

 

누군가는

소라게처럼 살기도 한다

허름한 집에

 

작은 구들 들이고

마음 졸이며

들락날락

 

 

함박눈

 

눈이 내린다

내려놓으려고

무거운 마음 내려놓으려고

눈이 내린다

 

괜찮다고

다 괜찮다고

오늘은 좀 쉬겠다고

눈이 내린다

 

누워 하늘을 쳐다보겠다고

하염없이

하염없이 바라보겠다고

눈이 내린다

 

 

 

봄은 폐허를 뚫고 온다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마른 껍질을 깨고 나오는 난생의 파충류처럼

 

봄은 망각 속에서 온다

가까운 겨울, 그 너머의 아득한 계절들도

마치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처럼

 

봄은 천진한 생명으로 온다

모든 그늘과 죽음들을 외면하며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러니 봄이여 오라

폭풍처럼 오라, 빅뱅이 일어나듯

난바다의 파도처럼 한 번에 밀려오라

 

 

미련

 

괜히 왔다 간다

 

뭐 볼 것 있다고

 

분꽃 다 진 어스름 빈집

 

능소화 줄기 너머로 기웃기웃

 

초여름 저녁 별 하나

 

 

우두커니

 

다시 가을이 가까워졌다

내 생애에 몇 번째인가

 

헤어지고 영영 못 만나는 것들이 늘었다

지키지 못한 언약도 쌓였다

 

풀잎들이 지워진 산등성이마다

우두커니 비워진 무덤들

 

하늘이 하얗게 넓어졌다

일찍 떨어진 잎들은 실금만 남았다

 

내 생애에 다시 몇 번째인가

바람이 낙엽 밟아 오는 소리 듣는다

 

 

                  *진하 시집 제웅의 노래(시작시인선 0394, 2021)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