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13호실 그 사람
항상
행복한 순간으로 간직하고 싶었을 게다
생각나는 순간은 기쁜 날이었고
세상에서 못 이룰 것은 없었을 것이다
당신 때문에 누가 울고 있는지
당신은 생각지 않고 웃고 있네요
신선이 된 양 여기저기 돌아다니네요
그래도 당신은 울지 않아 좋네요
어머니께 갈치 사다 드린다고
장 보러 가자고 하는 형님에게 오늘은
어머니 기일이라고 차마 말하지 못하고
다음에 가자고 눈물보다 빠르게
뒤돌아 나왔습니다
♧ 아버지 6
-삶
자신의 삶을 살아보긴 했을까?
부귀영화를 바란 것도 아니며
쾌락만을 쫓는 것도 아니며
한평생을 자신을 감춰두고
자식으로 살다가
남편으로 살다가
아버지로 살다가
살다가 먼 길 홀로 가신
나의 아버지
♧ 형수
중산간 마을 제상에
난데없는 문어 적이 올라온 것은
수줍게 처음 본 사람에게
형수님이라고 불렀던
철부지 까까머리 시절이었다
고무 옷을 옥죄는 허리띠에
납덩이를 주렁주렁 매달고
바다로 내려가곤 했다
시아버지 생신 시할아버지 제사
명절, 설날은 해마다 돌아오고
더 깊은 바다로 간다는 것은
허리에 매다는 추도 그만큼 많아진다는 것
몸으로 느껴지는 문어의 빨판이었다
자신을 바다 깊숙이 끌어당기는
삶의 무게였다
깊이 내려가야 더 많이
건져 올릴 수 있기에
오늘도
추를 하나 더 매달고
자맥질한다
던져 버리고픈 삶의 무게를
허리에 두르고 담담히 침잠한다
한 움큼 먹은 뇌선이
서서히 바다로 퍼진다
두통을 앓은 바다가 잠잠해졌다
♧ 바람
바람을 쌓아 바람을 막는다
돌멩이가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하나하나에 의미를 담고
떨어지면 다시 쓰러지면 다시
나의 바람은 평온한 일상
바람으로 바람을 막는다
♧ 거미
굳이 알리지 않아도 만남은 이루어지리라
기약은 없지만 기다리고 있으면
지나가는 바람이 그대를 유혹하고
반짝거리는 햇살이 인도하겠지
나는 기다림에 익숙하니까
그대는 무심코 지나가다가
내가 기다리고 있음을 알겠지
그대에겐 악연이고 나에게는 행운이기에
그대가 원하지 않는 나의 일방적인 만남이겠지
기다리고 기다리다 지쳐
내가 먼저 죽을 수도 있겠지
그래도 나는 기다릴 뿐이다
은밀하게
질리게
나의 기다림은 진행 중이다
♧ 비 옵니다 3
-장마 3
비 옵니다
어제도 오고 오늘도 비 옵니다
하늘에 구멍이 난 듯 그칠 줄 모릅니다
서로가 국민을 위한다고 여의도 상공에서 충돌하여
힘겨루기 하듯
잔뜩 독 오른 두 기단이 충돌하여
비는 쉴 새 없이 내리고
한 치의 양보 없는 진흙탕 싸움 속에
보류된 법안들이 한강 변으로 떠내려가고
국민의 생활도 휩쓸려 내려갑니다.
비옵니다
비 좀 그만 내리길 비옵니다
속 타는 농부들 노래합니다
비야 비야 작작 오라
장통 밭디 물 골람저
* 양동림 시집 『마주 오는 사람을 위해』 (한그루 시선, 2021)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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