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갈 지之의 무르팍
뼈를 묻겠다는 각오는
생生을 기록하는 원형
누구에게 고개 숙여본 적 없는
죽어도 죽지 않는 고사목枯死木
그늘을 딛고 일어서 보는 세상
세상사 맨 앞으로 튀어나가던 오지랖
바람의 송곳니가 내는 무수한 칼집
궂은 날이면
가슴 아린 톱질마다 드러누워
가장 먼저 녹꽃을 피우는
물큰한 울음소리
흙 묻은 그림자 털고
무르팍으로 걸어가는 之 之 之
친필로 쓰는 최후의 통첩인가
한때는 눈부셨던
너, 직립의 뿔난 생生
♧ 판게아*
언제나 진앙지는 위층이다.
며칠 전부터 내비치던 작은 삐걱거림
요동치며 들썩이다 뜨거운 응어리를 분출하는 활화산
대륙은 원래 하나였다.
엉겨 붙어 떼어놓기 힘들었던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생존경쟁이 서로를 길들인다
해수면이 상승하고
매몰된 응어리들이 터져 나와
가슴 밑바닥부터 흔들린다
미처 다독이지 못한 마음들이
서로를 밀어내며 두 쪽으로 갈라진다
눈 뜬 밤을 걷는다
매번 바뀌는 지형
심연에 도달하지 못한
빙하기를 견딘다
돌아누운 두 대륙 사이
살얼음을 오가는 나는
밑에서 오랫동안 힘을 받아 휘어진 지층
---
* 1915년 A.베게너가 대륙이동설을 제창하였을 때 제안한 가상의 대륙.
♧ 기우杞憂
--호랑이 해봐
--고양이
--아니 고양이 말고 호랑이
--고양이
--근육이 덜 익었구나
자정에 태어난
너는 정이 많은 아이
올 때마다 질문을 바꿔
우상을 가위로 오려 옷을 입히고
그림자를 장난감처럼 갖고 노는
죽지도 않고 살지도 않는
이따금 울부짖다가
서걱거리는
종이호랑이
♧ 물의 무용담武勇談
-취업을 준비하는 k에게
물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는 그런 날
천리天理를 보고 물때를 아는 사나운 짐승들이
세상의 밤을 여닫는다지
거친 물살을 들이받지도 날아오르지도 못하고
독기 바짝 오른 물소리를 가산점으로
흐르는 물처럼 사는 게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입을 벌리며 휘몰아치는 빙산들
신이 없는 것을 아는 종족들은
밤마다 이빨이 길어진다지
흰 뼛조각 위로 모여드는 비린내
포말이 이는 눈꺼풀에 접안한 한 잔 두 잔
파닥거리는 비정규직 이력서에 파문이 일고
삼키지도 못한 채 서로 뒤엉키며
급물살을 타는 물살의 울음소리
검푸른 가계家系를 떠받들던 몸의 경계,
한사코 벼랑으로 흐르던 표정을 건져내고
비틀거려도 겨루어 보고 싶은 그대들의 신이고자
아슬아슬하게 물의 무늬를 찢고 걸어 나오는
한때 웅덩이 밖 끓어 넘치던 쇳물, 그 환호성
열 개의 손톱이 행간을 빠져나가는 쓰나미
유빙流氷의 경전을 통과한다
♧ 어느 섬의 짧은 고백
수몰된 문장들이 뭍을 오르는 사월
울컥거리는 한 줌 섬
제 흐느낌에 놀라 계절 밖으로 빠져나간다
아직 벙글지 않은 봄날이
봉오리째 무릎 위로 출렁, 밀려온다
나는 피사체로 갇힌 풍경, 온몸이 상처투성이 바다를 부등켜안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다 깊이 잠든 역사의 골짜기마다 나를 깨우는 소리 눈밭을 달려온 청춘 꽃 진 자리 철지난 꽃처럼 아무렇게나 뜯긴다 바람이 슬려 반복되는 계절은 나를 비껴간다 땅을 딛고 서서 온몸으로 지켜 낸 들판 그림자 하나 남겨 놓고 간다 눈 감고 간다
늦게 피는 섬도
섬이다
어디에 있든 그대를 기억하는
섬,
그 사월이 환하다
*고영숙 시집 『나를 낳아주세요』 (리토피아, 2021)에서
'문학의 향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詩' 12월호 '작품상 수상자 특집' 강우현의 시 (0) | 2021.12.16 |
---|---|
정형무 시집 '닭의장풀은 남보라 물봉선은 붉은보라'의 시(3) (0) | 2021.12.15 |
양동림 시집 '마주 오는 사람을 위해'의 시(4) (0) | 2021.12.13 |
진하 시집 '제웅의 노래'의 시(3) (0) | 2021.12.12 |
김승립 시집 '벌레 한 마리의 시'(4) (0) | 2021.12.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