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고영숙 시집 '나를 낳아주세요'의 시(4)

김창집 2021. 12. 14. 00:14

 

갈 지의 무르팍

 

뼈를 묻겠다는 각오는

을 기록하는 원형

누구에게 고개 숙여본 적 없는

죽어도 죽지 않는 고사목枯死木

그늘을 딛고 일어서 보는 세상

세상사 맨 앞으로 튀어나가던 오지랖

바람의 송곳니가 내는 무수한 칼집

궂은 날이면

가슴 아린 톱질마다 드러누워

가장 먼저 녹꽃을 피우는

물큰한 울음소리

흙 묻은 그림자 털고

무르팍으로 걸어가는 之 之 之

친필로 쓰는 최후의 통첩인가

한때는 눈부셨던

 

, 직립의 뿔난 생

 

 

판게아*

 

언제나 진앙지는 위층이다.

며칠 전부터 내비치던 작은 삐걱거림

요동치며 들썩이다 뜨거운 응어리를 분출하는 활화산

 

대륙은 원래 하나였다.

엉겨 붙어 떼어놓기 힘들었던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생존경쟁이 서로를 길들인다

 

해수면이 상승하고

매몰된 응어리들이 터져 나와

가슴 밑바닥부터 흔들린다

 

미처 다독이지 못한 마음들이

서로를 밀어내며 두 쪽으로 갈라진다

 

눈 뜬 밤을 걷는다

매번 바뀌는 지형

 

심연에 도달하지 못한

빙하기를 견딘다

 

돌아누운 두 대륙 사이

살얼음을 오가는 나는

 

밑에서 오랫동안 힘을 받아 휘어진 지층

 

---

* 1915A.베게너가 대륙이동설을 제창하였을 때 제안한 가상의 대륙.

 

 

기우杞憂

 

--호랑이 해봐

--고양이

 

--아니 고양이 말고 호랑이

--고양이

 

--근육이 덜 익었구나

 

자정에 태어난

너는 정이 많은 아이

 

올 때마다 질문을 바꿔

우상을 가위로 오려 옷을 입히고

 

그림자를 장난감처럼 갖고 노는

 

죽지도 않고 살지도 않는

 

이따금 울부짖다가

서걱거리는

 

종이호랑이

 

 

물의 무용담武勇談

   -취업을 준비하는 k에게

 

물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는 그런 날

천리天理를 보고 물때를 아는 사나운 짐승들이

세상의 밤을 여닫는다지

거친 물살을 들이받지도 날아오르지도 못하고

독기 바짝 오른 물소리를 가산점으로

흐르는 물처럼 사는 게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입을 벌리며 휘몰아치는 빙산들

신이 없는 것을 아는 종족들은

밤마다 이빨이 길어진다지

흰 뼛조각 위로 모여드는 비린내

포말이 이는 눈꺼풀에 접안한 한 잔 두 잔

파닥거리는 비정규직 이력서에 파문이 일고

삼키지도 못한 채 서로 뒤엉키며

급물살을 타는 물살의 울음소리

검푸른 가계家系를 떠받들던 몸의 경계,

한사코 벼랑으로 흐르던 표정을 건져내고

비틀거려도 겨루어 보고 싶은 그대들의 신이고자

아슬아슬하게 물의 무늬를 찢고 걸어 나오는

한때 웅덩이 밖 끓어 넘치던 쇳물, 그 환호성

열 개의 손톱이 행간을 빠져나가는 쓰나미

유빙流氷의 경전을 통과한다

 

 

어느 섬의 짧은 고백

 

  수몰된 문장들이 뭍을 오르는 사월

 

  울컥거리는 한 줌 섬

  제 흐느낌에 놀라 계절 밖으로 빠져나간다

 

  아직 벙글지 않은 봄날이

  봉오리째 무릎 위로 출렁, 밀려온다

 

  나는 피사체로 갇힌 풍경, 온몸이 상처투성이 바다를 부등켜안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다 깊이 잠든 역사의 골짜기마다 나를 깨우는 소리 눈밭을 달려온 청춘 꽃 진 자리 철지난 꽃처럼 아무렇게나 뜯긴다 바람이 슬려 반복되는 계절은 나를 비껴간다 땅을 딛고 서서 온몸으로 지켜 낸 들판 그림자 하나 남겨 놓고 간다 눈 감고 간다

 

  늦게 피는 섬도

  섬이다

 

  어디에 있든 그대를 기억하는

 

  섬,

 

  그 사월이 환하다

 

 

                              *고영숙 시집 나를 낳아주세요(리토피아, 2021)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