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채석강
아주 오래전부터 동행한 당신과 나
발자국 소리가 뚜렷이
숨소리가 뚜렷이 국경을 넘네
절벽 너머 그 너머
아무나 신을 수 없는 태초 부족장 신발로
수천 광년을 말아 올리는 소리
수천 광년을 말아 내리는 소리에
더 단단해진 사원
못 다한 말과 행위가 거기에 다 기록되어 있다는?
기억으로부터 버림받은 통증
거부의 날은 뼈 속에서 흔들리고
절벽은 매일매일
누군가를 지켜준 수문장이었을 것이네
자근자근 밟히는 태양의 파편
섬의 신발은 문명이 두렵네
갯벌 속 침묵이 아늑히 느껴질 뿐
아주 오래 전부터 견뎌온 문장
아무나 알아들을 수 없는 부족장 언어가
빽빽하네
♧ 저물녘 바다
나 아닌 나는 어디로부터 오는가, 작동흥분
무수한 꿈을 지켜낸 구름, 바다의 둔부
그대들도 해야 할 일이 점점 늘어가겠구나.
내 꿈도 수천 번 파도와 부딪히면
황량한 뒷골목, 어제의 절망도 밋밋해질까.
신비를 쫓아 내달렸던 스무 살이 풍금소리
완벽한 욕심이 언제 있었나? 되묻겠지.
몸 전체가 기회인
그대 애덕이 지속적이라면
나 아닌 나는 그대이고 싶네
포도주와 칸나가 뒤섞인 아늑한 노을 집.
♧ 홍시
아이의 심한 다이어리어diarrhea에 좋다 하여 껍질을 까서 접시에 올려준 적 있다
어머니, 홍시는 이렇게 먹는 게 아니에요 꼭지 반대편에 작은 구멍을 내서 쪽쪽 빨면 감쪽같이 껍질만 남고요 알은 제 혀를 헤집고 다니며 즐거워해요, 어디서 그런 기술을 배웠냐고 물었더니 요구르트를 먹는 것에서 아이디어를 얻었고요, 홍시와 요구르트는 느낌이 달라요 요구르트는 아껴먹는 이유도 있지만 수학이 풀리지 않을 땐 뇌를 박박 긁는 회초리죠 그런 반면 홍시는 잡념을 없애요 마술부채처럼, 문제는 빠는 힘을 조절하지 않으면 순식간 입 주위에 홍수가 난다는 거예요
며칠 전 딴 감이 단풍잎보다 붉다 불경스런 소문을 피해 방갈로에 홀로 앉아 홍시를 빠는 중이다 홍수가 나지 않도록 모진 일 견디고 있는 바깥을 쓰다듬고 싶은 것이다
♧ 당귀
당귀가 끓는 물에 뒤척거린다
우려내는 물은 낙타의 그윽한 눈
아가, 추석에는 꼭 강원도에 오너라, 너 주려고
심은 당귀가 내 팔뚝만 하구나
두 줄의 안부를 묻고는 추석 지나 이레 만에 아버님은
뒷밭의 실한 당귀가 되셨다
우려내면 낼수록 짙어지는 향기,
자기 땅이라고 우기는 황소개구리를 내쫓는다
개발지역이 아니라고 빨간 띠 두르고 진종일 외치던
팔순 노인을 위로한다
스르륵 목젖을 넘어가는 당귀차
아버님 말씀이 졸졸졸 흐른다
국위선양이 뭐 따로 있나, 이 당귀 먹고
아들 딸 잘 키우며 남편 내조 잘하는 것이 국위 선양이지
나는 여태껏 정치권에 서지 못했어도
뿌리의 속성만을 터득하며 살아왔다
마실 때는 고약하게 쓴 것 같아도 마시다 보면
자연히 다루는 법도 알게 되지
아가, 당귀가 바로 세상이여
♧ 그늘의 문장
엎질러진 남자의 끝자락에서 그늘이 펼쳐졌다 주름치마같이 물결 발자국같이 그늘진 쪽으로 휘어져 등줄기가 뻣뻣해진다 호흡과 호흡 사이 가느다란 떨림줄 같은 것들이 목 뒤로 흐르는 핏방울들이 하늘과 땅의 경계를 가르면서 나를 밀고 당긴다 그늘이 그늘을 뱉어내면서 넌출거리면서 그와 내가 뭉뚱그려지고 흔적 없이 사라지고
어쩌다 복도 난간에서 번뜩이는 너를 만날 때도 있다 4차원의 세계로 들어가 허리를 빙글빙글 돌리며 핑크색 돌고래가 되거나 플라스틱을 와작와작 씹으면서 밀림 속 나비 족이나 될까 지그시 눈을 감으면 펼쳐진 그늘 속으로 내가 빨려든다 허공이 끌려온다 바깥세상을 기웃거리는 그 틈새 코발트빛 토막 하늘이 부서져 내리고
♧ 잎 없는 나무
아내에게 잡혀 사는 아들이
마른풀 뽑고 있는 아버지께 말을 건넨다
아버지, 벌써부터 여기 오시면 어쩝니까
아녀, 내가 가야 할 자리 내가 보살펴야지
나 떠난 후 네 엄마 잘 부탁한다
네 엄마 더는 울게 하지 마라
아버지 무슨 그런 말씀 하십니까
이제 어머니께 사랑한다는 말씀도 하시고
두 분 오래오래 사셔야죠
우린 말 안 해도 다 안다
너희들은 잘 모르지?
요즘 젊은이들은 사랑만 가지고 못살아
그 놈의 물욕이 요물이여
오늘 죽을 것 같아도
남자는 나무와 같으니
고요히 사계절 견디는 법을 알지
* 이강하 시집 『붉은 첼로』 (시와 세계, 201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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