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붉은 송악산
미어진 등성이 보면 밭 하나가 참 무섭네
출입통제 금줄 치고 눕는 날 잦은 산이
억새꽃 한 판 춤사위 살이라도 푸는가
바다에 얼굴 묻고 파도에 소리를 묻네
간격을 포기하고 빽빽이 수직으로 맞선 날
톱날에 산 울음소리 토막토막 잘려나가네
휑하니 빠져버린 내 머리 같은 소나무들
송충이 잡아가며 성충으로 함께 커온
이제 막 이순을 넘긴 비탈의 붉은 생生이네
천고의 하늘빛이 산 빛 깨우고 물빛 깨워
바람에 빗살 진 풀빛 반지르르 기름이 돌면
재선충 흉흉한 흉터 푸른 결로 감춰질까?

♧ 새순
칼바람에 지친
억새들의 몰골을 봐
가슴 뜯던 손
허우적허우적
하늘도 흔들더니
핏물 든 대궁 속에서
날을 꺼낸다.
싸
아
악

♧ 월요일은 조크가 필요해 1
순번제 편찮으신 노모 수발을 드는 날
동생 출근하고 틈새 지킴이 삼십팔 번 채널
교대 조 들어서자마자 ‘우리 가요’ 한다

♧ 고등어회
고등어 곱게 포 떠
횡렬로 누운 활자들
초장 꾹 찍어 넣자 한 입에 착착 감긴다
단번에 습득한 언어
날로 먹었다

♧ 새
그믐 잘 넘기고 그림자 포개 누우니
문틀에 걸려 있는 속이 빈 저 쪽박
어느새
어느 새 한 마리
어느새 획 지나

♧ 축
허리가 삐끗할 때마다 앞이 캄캄해졌다
팔월 소나기처럼 침 꽂히고 부황 뜬 자리
초고속 슬라이드에 잡힌
내 몸은 지금
개기일식 중
* 이애자 시집 『하늘도 모슬포에선 한눈을 팔더라』 (시와 표현, 2016)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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