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족
세상에 만족이 있느냐. 인생에게 만족이 있느냐.
있다면 나에게도 있으리라.
세상에 만족이 있기는 있지마는, 사람의 앞에만 있다.
거리는 사람의 팔 길이와 같고, 속력은 사람의 걸음과 비례가 된다.
만족은 잡을래야 잡을 수도 없고, 버릴래야 버릴 수도 없다.
만족을 얻고 보면 얻은 것은 불만족이요, 만족은 의연히 앞에 있다.
만족은 우자나 성자의 주관적 소유가 아니면 약자의 기대뿐이다.
만족은 언제든지 인생과 수적(竪的) 평행이다.
나는 차라리 발꿈치를 돌려서 만족의 묵은 자취를 밟을까 하노라.
아아 나는 만족을 얻었노라.
아지랑이 같은 꿈과 금실 같은 환상이 님 계신 꽃동산에 둘릴 때에, 아아 나는 만족을 얻었노라.
♧ 반비례
당신의 소리는 ‘침묵’인가요.
당신이 노래를 부르지 아니하는 때에, 당신의 노랫가락은 역력히 들립니다그려.
당신의 소리는 침묵이어요.
당신의 얼굴은 ‘흑암’인가요.
내가 눈을 감은 때에 당신의 얼굴은 분명히 보입니다그려.
당신의 얼굴은 흑암이어요.
당신의 그림자는 ‘광명’인가요.
당신의 그림자는 달이 넘어간 뒤에, 어두운 창에 비칩니다그려.
당신의 그림자는 광명이어요.
♧ 눈물
내가 본 사람 가운데는, 눈물을 진주라고 하는 사람처럼 미친 사람은 없습니다.
그 사람은 피를 홍보석이라고 하는 사람보다도, 더 미친 사람입니다
그것은 연애에 실패하고 흑암의 기로에서 헤매는 늙은 처녀가 아니면, 신경이 기형적으로 된 시인의 말입니다.
만일 눈물이 진주라면 나는 님이 선물(膳物)로 주신 반지를 내놓고는 세상에 진주라는 진주는 다 티끌 속에 묻어 버리겠습니다.
나는 눈물로 장식한 옥패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나는 평화의 잔치에 눈물의 술을 마시는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내가 본 사람 가운데는, 눈물을 진주라고 하는 사람처럼 어리석은 사람은 없습니다.
아니어요, 님이 주신 눈물은 진주눈물이어요.
나는 나의 그림자가 나의 몸을 떠날 때까지, 님을 위하여 진주 눈물을 흘리겠습니다.
아아 나는 날마다 날마다 눈물의 선경(仙境)에서 한숨의 옥적(玉笛)을 듣습니다.
나의 눈물은 백천(百千) 줄기라도, 방울방울이 창조입니다.
눈물의 구슬이여, 한숨의 봄바람이여, 사랑의 성전을 장엄하는 무등등(無等等)의 보물이여.
아아 언제나 공간과 시간을 눈물로 채워서 사랑의 세계를 완성할까요.
♧ 어디라도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하려고 대야에 물을 떠다 놓으면, 당신은 대야 안의 가는 물결이 되어서, 나의 얼굴 그림자를 불쌍한 아기처럼 얼러줍니다.
근심을 잊을까 하고 꽃동산에 거닐 때에, 당신은 꽃 사이를 스쳐오는 봄바람이 되어서, 시름없는 나의 마음에 꽃향기를 묻혀 주고 갑니다.
당신을 기다리다 못하여 잠자리에 누웠더니, 당신은 고요한 어둔 빛이 되어서 나의 잔부끄럼을 살뜰히도 덮어 줍니다.
어디라도 눈에 보이는 데마다 당신이 계시기에, 눈을 감고 구름 위와 바다 밑을 찾아 보았습니다.
당신은 미소가 되어서 나의 마음에 숨었다가, 나의 감은 눈에 입 맞추고 ‘네가 나를 보느냐.’고 조롱합니다.
♧ 나의 꿈
당신이 맑은 새벽에 나무 그늘 사이에서 산보할 때에, 나의 꿈은 작은 별이 되어서 당신의 머리 위에 지키고 있겠습니다.
당신이 여름날에 더위를 못 이기어 낮잠을 자거든, 나의 꿈은 맑은 바람이 되어서 당신의 주위에 떠돌겠습니다.
당신이 고요한 가을밤에 그윽이 앉아서 글을 볼 때에, 나의 꿈은 귀뚜라미가 되어서 책상 밑에서 '귀뚤귀뚤' 울겠습니다.
♧ 인과율
당신은 옛 맹세를 깨치고 가십니다.
당신의 맹서는 얼마나 참되었습니까. 그 맹서를 깨치고 가는 이별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참 맹서를 깨치고 가는 이별은 옛 맹서로 돌아올 줄을 압니다. 그것은 엄숙한 인과율(因果律)입니다.
나는 당신과 떠날 때에 입 맞춘 입술이 마르기 전에, 당신이 돌아와서 다시 입 맞추기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당신이 가시는 것은 옛 맹서를 깨치려는 고의가 아닌 줄을 나는 압니다.
비겨 당신이 지금의 이별을 영원히 깨치지 않는다 하여도, 당신의 최후의 접촉을 받은 나의 입술을 다른 남자의 입술에 대일 수는 없습니다.
* 한용운 시집 『님의 침묵』 (삼중당, 1983)에서
* 사진 : 경주 남산에서(필터 - 수채화 기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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