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문충성 시집 '빈 길'의 시(2)

김창집 2022. 4. 23. 07:55

 

꽃에게

 

천자는 온통 난리통

여기 저기 꽃 피어나는 소리들

! 참으로 시 쓰는 일이 부끄럽구나!

 

문 열어라

문 서방 왔다, 꽃이여!

그깟 벌 나비들

쫓아버려라 멀리

 

살기 위해

밥을 구걸하지 말라

빛나는 날이 없어도 어둠 속에서

어둠 삭이며 빛나는 사랑을

꽃 피울 줄 아느니

 

험한 가시밭길 터진 구두 신고

걸어 왔다 피 흘리며

문 열어라! 꽃이여!

꽃 피우던 꽃 한 송이

봄볕 날개 달고

천공을 날고 있구나!

이름도 없이

 

 

 

위대한 죽음

 

친구들과 저녁 먹을 때

정 아무개가 밥이고

돈이고

빌어먹을 문화고 예술이고

알 바 없다

12층에서 떨어져 죽었다고

떠들고 있을 때

한 친구가 말했네

-나는 1층짜리 집에 살아서

떨어져 죽을 수가 없어!

그때 누군가가 말했지

-그래, 떨어져 죽을 생각은 해보고?

 

 

 

만남의 끝 혹은 시작

 

만나자 전화했다 만남 대신에

전화 왔다 소학교

어깨동무들

 

전화해도 받지 않는다

싸구려 이동전화에 가입했나?

어니면 해지했나?

 

언제나

자주 변해 가는

세상 떠나 저 세상 갔나

알 수 없다?

 

그래, 그래

빈 길 되어버린

우리 집

앞에서 우리 만나자?

 

 

 

아름다운 새해를 맞이하기 위한 기도

 

올해도

산 위에 오르거나

바닷가에서 새해

맞지 않게 하소서

이불 속에서 제발

 

뜨는 해를 맞게 하소서

삼백육십오 일

하루 같이

밥 잘 먹고

똥 잘 눌 수 있게

 

새해 같이

하느님

 

 

 

광화문 앞을 지나며

 

비가 먼저 떠난다 진짜 가짜들

빗소리가 나중에 떠난다

 

피난길 떠난다

양심도 자리를 비운다 우리 시대

 

고뇌와 슬픔도 떠난다

죽음 떠나면 남는 건

무엇이 있을까

 

광화문 앞을 지나며

조선왕조 어찌 오백 년뿐이랴

그 꼴도 보기 싫은

천하 잡소리 판치는

패거리들

 

만난다

고림 고독

적막

겨울

 

, 빗소리

한 잎

마지막으로 떠난다

 

 

 

앞문에서

 

아무리 열려 애쓰지만 문은 열리지 않습니까

 

바깥 세상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캄캄합니까 언제나

 

환한 안 세상에서 울고 있습니까 나는

 

잠자거나

 

놀거나

 

똥 싸거나

 

결코 배고파 우는 게 아닙니까

 

닫혀 있습니까 문은 아무리 열려 애쓰지만

 

반세기 동안 그리운 녀석들 먼저 열고 갔습니까

 

그것은 내 죽음들이었습니까 생각해 보면 곰곰이

 

 

                             * 문충성 시집 먼 길(, 2008)에서

                                          * 사진 : 흰철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