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꽃에게
천자는 온통 난리통
여기 저기 꽃 피어나는 소리들
아! 참으로 시 쓰는 일이 부끄럽구나!
문 열어라
문 서방 왔다, 꽃이여!
그깟 벌 나비들
쫓아버려라 멀리
살기 위해
밥을 구걸하지 말라
빛나는 날이 없어도 어둠 속에서
어둠 삭이며 빛나는 사랑을
꽃 피울 줄 아느니
험한 가시밭길 터진 구두 신고
걸어 왔다 피 흘리며
문 열어라! 꽃이여!
꽃 피우던 꽃 한 송이
봄볕 날개 달고
천공을 날고 있구나!
이름도 없이

♧ 위대한 죽음
친구들과 저녁 먹을 때
정 아무개가 밥이고
돈이고
빌어먹을 문화고 예술이고
알 바 없다
12층에서 떨어져 죽었다고
떠들고 있을 때
한 친구가 말했네
-나는 1층짜리 집에 살아서
떨어져 죽을 수가 없어!
그때 누군가가 말했지
-그래, 떨어져 죽을 생각은 해보고?

♧ 만남의 끝 혹은 시작
만나자 전화했다 만남 대신에
전화 왔다 소학교
어깨동무들
전화해도 받지 않는다
싸구려 이동전화에 가입했나?
어니면 해지했나?
언제나
자주 변해 가는
세상 떠나 저 세상 갔나
알 수 없다?
그래, 그래
빈 길 되어버린
우리 집
앞에서 우리 만나자?

♧ 아름다운 새해를 맞이하기 위한 기도
올해도
산 위에 오르거나
바닷가에서 새해
맞지 않게 하소서
이불 속에서 제발
뜨는 해를 맞게 하소서
삼백육십오 일
하루 같이
밥 잘 먹고
똥 잘 눌 수 있게
새해 같이
하느님

♧ 광화문 앞을 지나며
비가 먼저 떠난다 진짜 가짜들
빗소리가 나중에 떠난다
피난길 떠난다
양심도 자리를 비운다 우리 시대
고뇌와 슬픔도 떠난다
죽음 떠나면 남는 건
무엇이 있을까
광화문 앞을 지나며
조선왕조 어찌 오백 년뿐이랴
그 꼴도 보기 싫은
천하 잡소리 판치는
패거리들
만난다
고림 고독
적막
겨울
아, 빗소리
한 잎
마지막으로 떠난다

♧ 앞문에서
아무리 열려 애쓰지만 문은 열리지 않습니까
바깥 세상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캄캄합니까 언제나
환한 안 세상에서 울고 있습니까 나는
잠자거나
놀거나
똥 싸거나
결코 배고파 우는 게 아닙니까
닫혀 있습니까 문은 아무리 열려 애쓰지만
반세기 동안 그리운 녀석들 먼저 열고 갔습니까
그것은 내 죽음들이었습니까 생각해 보면 곰곰이
* 문충성 시집 『먼 길』 (각, 2008)에서
* 사진 : 흰철쭉

'문학의 향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길웅 시집 '다시 살아나는 흔적은 아름답다'(2) (0) | 2022.04.25 |
---|---|
김혜천 시집 '첫 문장을 비문으로 적는다'의 시(3) (0) | 2022.04.24 |
계간 '제주작가' 2022년 봄호의 시(2) (0) | 2022.04.22 |
박남준 시집 '그 아저씨네 간이 휴게실 아래' (2) (0) | 2022.04.21 |
김석교 시집 '봄날 아침부터 가을 오후까지'(3) (0) | 2022.04.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