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한희정 시집 '목련꽃 편지'의 시조(5)

김창집 2022. 7. 12. 00:25

 

노래처럼 전설처럼

 

숨 가쁘게 살았어도 내력은 푸르러라

담담히 풀어내는, 가슴 속 숨겼던 말

담쟁이 뒤틀린 마디에 푸른 혈관 보이네

 

몇 겹을 돌고 돌아 새 옷 한 벌 입으셨나

아쉬운 명주 한필 구름으로 감아 놓고

오늘도 오백나한에 두 손 꼭꼭 모으며

 

제주 땅에 산다는 건 뿌리를 내리는 거

구멍 난 치마폭으로 섬에다 섬을 얹으며

긴 여정 설문대할망이 맨발로 와 계시다

 

 

 

내 이제 와 알겠네

 

산다는 건 토란잎에

이슬 같다는 울 엄니

 

팔 남매를 낳았고

증손자도 둘인데

 

한순간

꿈같다는 걸,

내 이제와 알겠네

 

 

 

어머니의 꽃브로치

 

비로드 저고리에 제짝이던 브로치가

 

삐걱이는 서랍 속에 초롱초롱 깨어서

 

접혔던 어머니 시간이 일렁이고 있네요

 

 

어쩌다 아버지와 동반 외출하는 날은

 

두어 발 뒤에 서서 만지고 또 매만지시던

 

상기된 얼굴빛만큼 가슴에도 피던 꽃

 

 

사십 년 세월에도 모정은 곱게 남아

 

해묵은 상속에도 기쁨이 넘친 오늘

 

대물림 꽃 브로치가 내 가슴에 웃네요

 

 

 

심리적 흡입기

 

면발처럼 늘어진 세밑 밤을 홀딱 새우고

 

폭설 쌓인 귤 밭 사이 더듬더듬 길을 내어도

 

도무지 터지지 않네 뱅뱅 도는 기억회로

 

무의식 어디쯤에 시무더기는 없을까

 

밥알 같은 자판에다 한 알 한 알 되새김해도

 

어쩐담! 긴 손톱 닮은 귤껍질만 수북한 걸

 

 

 

손은 위대하다

 

못 갚은 이자 돈처럼 주렁주렁 달렸다

풍년 든 귤밭에서 또각또각 가위질

끝 모를

가격 폭락에

인부 한 명 못 사고

 

차라리 두 손으로 훑었으면 좋으련만

찔릴까 또 베일까 공손히 떠받들며

귤 한 개

툭 떨군 손에

파랑새가 앉는다

 

때론 무심하게 때론 엄숙하게

땀시민 다 따주게소박한 진리 앞에

어느 새

비워서 충만한

초록 경전 펼친다

 

 

                                                  * 한희정 시집 목련꽃 편지(한그루, 2022)에서

                                                                       * 사진 : 제주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