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노래처럼 전설처럼
숨 가쁘게 살았어도 내력은 푸르러라
담담히 풀어내는, 가슴 속 숨겼던 말
담쟁이 뒤틀린 마디에 푸른 혈관 보이네
몇 겹을 돌고 돌아 새 옷 한 벌 입으셨나
아쉬운 명주 한필 구름으로 감아 놓고
오늘도 오백나한에 두 손 꼭꼭 모으며
제주 땅에 산다는 건 뿌리를 내리는 거
구멍 난 치마폭으로 섬에다 섬을 얹으며
긴 여정 설문대할망이 맨발로 와 계시다

♧ 내 이제 와 알겠네
산다는 건 토란잎에
이슬 같다는 울 엄니
팔 남매를 낳았고
증손자도 둘인데…
한순간
꿈같다는 걸,
내 이제와 알겠네

♧ 어머니의 꽃브로치
비로드 저고리에 제짝이던 브로치가
삐걱이는 서랍 속에 초롱초롱 깨어서
접혔던 어머니 시간이 일렁이고 있네요
어쩌다 아버지와 동반 외출하는 날은
두어 발 뒤에 서서 만지고 또 매만지시던
상기된 얼굴빛만큼 가슴에도 피던 꽃
사십 년 세월에도 모정은 곱게 남아
해묵은 상속에도 기쁨이 넘친 오늘
대물림 꽃 브로치가 내 가슴에 웃네요

♧ 심리적 흡입기
면발처럼 늘어진 세밑 밤을 홀딱 새우고
폭설 쌓인 귤 밭 사이 더듬더듬 길을 내어도
도무지 터지지 않네 뱅뱅 도는 기억회로
무의식 어디쯤에 시詩무더기는 없을까
밥알 같은 자판에다 한 알 한 알 되새김해도
어쩐담! 긴 손톱 닮은 귤껍질만 수북한 걸

♧ 손은 위대하다
못 갚은 이자 돈처럼 주렁주렁 달렸다
풍년 든 귤밭에서 또각또각 가위질
끝 모를
가격 폭락에
인부 한 명 못 사고
차라리 두 손으로 훑었으면 좋으련만
찔릴까 또 베일까 공손히 떠받들며
귤 한 개
툭 떨군 손에
파랑새가 앉는다
때론 무심하게 때론 엄숙하게
“땀시민 다 따주게” 소박한 진리 앞에
어느 새
비워서 충만한
초록 경전 펼친다
* 한희정 시집 『목련꽃 편지』 (한그루, 2022)에서
* 사진 : 제주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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