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윤행순 시집 '간호사도 가을을 탄다'의 시조(4)

김창집 2022. 7. 14. 00:02

 

행원 바다

 

사백 년 전 광해가 배 타고 온 행원포구

예닐곱 살 소녀들이 숨바꼭질하고 있다

저 바다 자맥질하면 못 찾겠다

진희야

 

 

 

백치미 사랑

 

서산에 해 걸리고 낙엽이 떨어진다

간다는 말도 없이 떠나는 마른 잎새

민오름 저 둘레길은 또 그렇게 지쳐간다

 

외진 돌 무덤가 한 남자 앉아있다

어느 가을 남몰래 감춰둔 으름열매처럼

둘레길 백치미 사랑 다시 잃은 것일까

 

쓰러진 저 소나무 누굴 기다리는 걸까

사랑한다 사랑한다 바보처럼 다 놓치고

그리움 가슴에 묻고 다시 길을 떠나는

 

 

 

황색등

 

허겁지겁 출근길 5 · 16도로 들어서면

빨강과 초록 사이 멈춰선 아버지의 시간

한사코 외면을 하는 양지공원 봉안소

 

낼모레가 기일 날 그냥 확 좌회전할까

아버지 바람기도 용서되는 가을날

돌담에 털머위마저 노란 낮달 피워낸다

 

 

 

부부

 

늦눈 몇 송이 내려앉는 왕이메오름

한때는 치사랑의 독약 같은 그리움도

이제는 따져 뭣하랴

너도 나도 바람꽃인 걸

 

 

 

토끼섬

 

오랜만에 바람 따라 물 따라 나섰는데

구좌읍 하도리 1번지 토끼섬이 보이네

이제껏 어디 숨었다 폴짝 뛰어 나왔니

 

낚싯대 하얀 뱃길 저 섬 끌고 갔는지

신병 들린 무당처럼 내 가슴도 끌고 간다

못다 쓴 습작시 한 줄 어디에나 놓고 갈까

 

가을 바다 떠도는 내 길은 어디쯤일까

썰물도 문주란도 편지처럼 접어놓고

길 하나 물에 잠기며 섬이 되는 사람아

 

 

                                * 윤행순 시집 간호사도 바람을 탄다(문학과사람, 2022)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