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워낭소리 - 박기섭
놋보시기 동치미에 살얼음이 깔린 아침
뒤울안 장독간을 눈발이 서성였다
이따금 흙담을 넘는 늙은 소의 워낭소리
-『문학청춘』 2021, 여름호
♧ 햄릿증후군 - 김숙희
누가 내다 버렸을까 원목의 책꽂이를
재활용품 모퉁이에 소낙비 맞고 있다
거둘 걸, 하는 마음이 집안까지 따라왔지
살다 보면 이러한 일 어디 한둘뿐이겠나
지난날 아차, 하다 놓쳐버린 말 한마디
다음에, 다음에 하다 엇갈렸던 길도 있지
-『열린시학』 2021, 겨울호
♧ 시 굽는 마을 - 김강호
반딧불이 빗금치는 강변마을 시인의 집
사무치게 서러운 소쩍새 울음 받아
시인은 시 한 덩이를 이슥토록 굽고 있다
설익어서 더 구우면 숯덩이가 되곤하는
드센 시와 씨름하다 지쳐버린 행간엔
상상의 완행열차가 덜컹이며 지나간다
깊은 잠 호리병으로 시인이 빠져들자
처마 끝 별들이 와서 시 굽는 시늉하더니
원고지 칸칸마다에 애벌레처럼 들었다
-『서정과 현실』 2021, 하반기호
♧ 고비, 사막 – 손영희
아버지, 간밤에 말이 죽었어요
그때 고삐를 놓은 건지 놓친 건지
쏟아진 햇살이 무거워 눈을 감았을 뿐
한 발 올라가면 두 발 미끄러지는
잿빛 모래언덕도 시간을 허물지 못해
이곳은 지평선이 가둔 미로의 감옥입니다
한세월 신기루만 쫓다가 허물어지는
사방이 길이며 사방이 절벽입니다
아버지, 간밤에 홀연히 제 말이 죽었어요
-『시조정신』 상반기호
♧ 한참을 울었다 - 신춘희
청탁이 오지 않아서 시집을 펴낸다
시들에게도 깃들어 살 집이 필요하니까
절망에 옹이가 박히니
절절함도, 깊어라
부질없다 중얼거리며 주소를 적다가
영혼이 너무 맑아서
애틋한 내 새끼들…
가슴에 꼬옥 껴안고
한참을, 울었다
-『서정과 현실』 (2021, 하반기호)
*정드리문학 제10집 『바람의 씨앗』 (황금알, 2022)에서
*사진 : 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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