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윤행순 시집 '간호사도 가을을 탄다'의 시조(5)와 꽃무릇

김창집 2022. 7. 21. 08:25

 

꽃무릇

 

이 세상에 내 것이란 하나도 없는 걸까

서해안 도는 길에 더 버릴 게 없어라

불갑사 꽃무릇마저 소신공양 하는 날

 

내 가슴 한 켠에도 절 한 채 지어볼까

꽃 지면 잎 튼다는 이해 못할 법문처럼

이대로 명치 한 끝이 저려 오는 사람아

 

 

 

햇살 한 줌

 

일자리도 벗들도 차라리 다 가져가라

구태여 원한다면 머리칼 한 올까지

한 생애 햇살 한 줌도

내 것이 아니었네

 

 

 

안세미오름

 

길 따라 능선 따라 싸락눈 싸락싸락

가는 이 오는 이 없는 깊숙한 안세미오름

쉼팡이 따로 있는가 쉬는 곳이 쉼팡이다

 

산다는 건 하루하루 목숨동냥 하는 일

첫 비행기 막 비행기 하늘까지 전세 놓고

오늘도 겨울 수치가 내려가길 기도한다

 

 

 

실랑이

 

아무리 붙잡아 봐라

그래도 나는 간다

 

자동차 할부금도 날 붙잡지 못한다

 

삼십 년

일한 이 자리

누가 놓지 못할 건가

 

 

 

습작

 

그대

가고 나면

나는 또 섬이 된다

 

추자도에 갇힌 날

비로소 길이 보인다

 

나흘 밤

집어등 없이

습작 시 한 줄 없이

 

 

 

고무나무

 

겨우내 베란다에 내놓은 고무나무

한 뼘 고무줄도 뽑아내지 못하고

겨우내 그리움 마르듯 잎사귀부터 말라간다

 

한 사발 수돗물로는 되살릴 수가 없다

선무당 사람 잡듯 나무를 떠나보낸

그렇게 내 그리움도

떠나버린 것은 아닐까

 

땡기면 늘어나고 놓으면 줄어들고

그렇게 팽팽한 너와 나의 거리처럼

튼실한 말레이시아 고무나무로 서고 싶다

 

 

 

                 *윤행순 시집 간호사도 가을을 탄다(문학과사람, 2022)에서

    *사진 : 꽃무릇(피려면 두 달 정도 남았지만, 시가 있어 사진첩에서 미리 소환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