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꽃무릇
이 세상에 내 것이란 하나도 없는 걸까
서해안 도는 길에 더 버릴 게 없어라
불갑사 꽃무릇마저 소신공양 하는 날
내 가슴 한 켠에도 절 한 채 지어볼까
꽃 지면 잎 튼다는 이해 못할 법문처럼
이대로 명치 한 끝이 저려 오는 사람아
♧ 햇살 한 줌
일자리도 벗들도 차라리 다 가져가라
구태여 원한다면 머리칼 한 올까지
한 생애 햇살 한 줌도
내 것이 아니었네
♧ 안세미오름
길 따라 능선 따라 싸락눈 싸락싸락
가는 이 오는 이 없는 깊숙한 안세미오름
쉼팡이 따로 있는가 쉬는 곳이 쉼팡이다
산다는 건 하루하루 목숨동냥 하는 일
첫 비행기 막 비행기 하늘까지 전세 놓고
오늘도 겨울 수치가 내려가길 기도한다
♧ 실랑이
아무리 붙잡아 봐라
그래도 나는 간다
자동차 할부금도 날 붙잡지 못한다
삼십 년
일한 이 자리
누가 놓지 못할 건가
♧ 습작
그대
가고 나면
나는 또 섬이 된다
추자도에 갇힌 날
비로소 길이 보인다
나흘 밤
집어등 없이
습작 시 한 줄 없이
♧ 고무나무
겨우내 베란다에 내놓은 고무나무
한 뼘 고무줄도 뽑아내지 못하고
겨우내 그리움 마르듯 잎사귀부터 말라간다
한 사발 수돗물로는 되살릴 수가 없다
선무당 사람 잡듯 나무를 떠나보낸
그렇게 내 그리움도
떠나버린 것은 아닐까
땡기면 늘어나고 놓으면 줄어들고
그렇게 팽팽한 너와 나의 거리처럼
튼실한 말레이시아 고무나무로 서고 싶다
*윤행순 시집 『간호사도 가을을 탄다』 (문학과사람, 2022)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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