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매미소리 – 조병기
키 큰 가죽나무 미루나무나
소나무, 감나무에 붙어
한여름을 울어쌓더니
요즈음은 허물조차 벗어 던지고
메타세쿼이아 기둥에 붙어 밤낮없이 울어댄다
논배미는 쩍쩍 갈라지는데
놈들은 죽어라 하고
제짝만을 불러댄다
하기야
한생애가 일곱 날이라니
목청이 터질지라도
유신이 부서질지라도
사투死鬪하는
생명들을 어찌하랴

♧ 벌초 – 윤석홍
늦여름 기운이 한창 남아 있을 때
일년에 한 번 찾아와 수런거리는 날
면허증 없는 이발사들이 몰려와
윙윙거리며 웃자란 풀을 베어낸다
구석구석 찾아 서툰 낫질로
빠르게 마무리하는 손놀림으로
말끔하게 다듬어진 반달 무덤
땀과 풀 냄새 가득 풍기는
무덤 앞에서 밥을 먹으며
내가 누울 곳이 여기인가 생가하니
헛헛한 마음이 든다
이발하신 조상님들이 시원하다
개운하다 환하게 웃으시는
모습이 영락없는 하회탈이다
벌초는 집안의 힘이다

♧ 구름 보기 ․ 2 – 이인평
산이 어지러울 정도로 구름이 돈다
내가 어지러울 정도로 너도 돈다
사랑만 하면 될 일을 가지고
입신양명을 좇아 너는 헤매기만 한다
가난을 살면 넉넉할 일을 가지고
재물을 찾아 너는 떠돌기만 한다
너를 유랑이라 할까 유령이라 할까
너를 보면 어지러울 정도로 내가 돈다

♧ 봄날의 왈츠 – 임영희
묵은 산이 가만히
고사리손을 뻗어
그미의 잠든 몸을 흔들고 있다
어서 일어나요
일어나요
부드럽고 섬세한 바람의 손길이
그미의 목덜미를 더듬고
막 기지개를 켠 그미의 입술에
바람의 입술이 닿는다
아아, 간지러워요
어디서 설익은 해를 한 동이
이고 와서는
그미의 얼굴에
주르륵 쏟아 붓고 가버린 아침
온 천지 구석구석이
거칠고 뜨거운 정사의 숨결로
지끈지끈 아득한 봄날

♧ 악마의 길 – 전선용
악마는 꽃을 사랑해서 지옥 가는 길이 꽃길이다
꽃비 맞으며 가라
가뭄 든 눈에 붉은 장미
두려움이 깊을수록 불신도 깊다
꽃을 좋아하는 당신이 허수아비 같아서
가을은 시베리아 벌판이다
안개 속에서 길을 잃었던가, 아니면
숨어들었던가
그래도 악마가 가는 길은 아우토반이다
거리낌 없이 가라
한잔 술이 백신이라서 면역이 생긴 호흡
향기 탕진한 꽃을 사랑해서
악마가 가는 지옥길이
꽃길이다
개처럼 가라.
* 월간 『우리詩』 2022년 8월호(통권 410호)에서
* 사진 : 자주색달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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