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 다랑쉬 – 김경훈
발굴 전에는
아버지의 유골이 세상에 나오기 전에는
얼마나 아버지를 욕하고 원망했는지 모른다
나고 자란 마을에서도 빨갱이새끼 손가락질 받으며
하다못해 코흘리개 동창들에게도 따돌림 당해
그렇게 도망치듯 육지로 밀려와 아버지를
잊으려고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워버리려고
양아치처럼 건달로 이제껏 살아왔다
발굴 후에는
도대체가 죄송스러워 견디지 못하겠다 왜
유골 한 줌이라도 내 손으로 거두어
묻어드리지 못하고 관의 압력에 굴복해
화장해서 뼛가루를 바다에 다 뿌려야만 했는지
어엿한 도백이 된 동창생 말만 믿어야 했는지
옛날처럼 정보기관은 왜 그렇게 무서운지
병신!
머저리 같은 놈!
도의회 김영훈 의원, 자신은
아버지가 육지형무소로 끌려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몰라 달랑 사진 한 장 놓고 제사 지내는데
너는 유골을 찾고서도 제대로 챙기지 못했느냐며
술 먹고 울면서 욕설을 퍼부어도 아,
시대 탓만 하기엔 정신이 없었다
줏대가 없었다
정신 잃은 채 시간이 가고
줏대 없이 시간이 흘러가고
오늘에서야 진로소주 한 잔을 올렸다
아버지, 다랑쉬굴에서
연기에 질식해 피 토하며 죽어가신
아버지, 불효자식 술잔 받으시고
이놈한테도 한잔 주십서
나도 이제 예순 넘어
아버지 곁에 갈 날 다 되어신디
오늘에서야 아버지 얼굴 같은
다랑쉬오름 앞에서
아버지 이름 한번 떳떳이 불러봠수다
고짜 순짜 환짜
아, 아버지!
♧ 봉인된 슬픔 - 김순선
커다란 돌
다랑쉬굴 입구를 막아버렸다
부끄러운 진실이
드러날까봐
입도 뻥끗 못하게
덕지덕지 시멘트로
막아버린 입
파란 하늘
따뜻한 햇살 한 줌
물 한 모금 그토록 애타게 그리워하며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
뒤척이고 뒤척이던 밤
부질없이 연기되어
사그라지고
손가락 하나 움직일 기력도 없이
쿨룩쿨룩
녹아내리던 봄
돌 속에 갇혀
점점 돌이 되어버린 죽음
♧ 손톱달 안부 - 김영란
1.
슬픔이 달처럼 내려앉고 있었어
어둠의 안쪽으로 얼굴 없는 사람들이
찢기고 피 흘리며 바닥을 긁고 있어
저 비좁은 돌 틈에 무슨 뜻으로 꽃은 폈나
오래 머물기엔 어둡고 깊은 동굴
빛도 새소리도 초목들도 다 어두운
은밀한 그 시간이 지켜보고 있었지
생솔가지 연기가 목을 가만 조여 왔어
손톱이 빠지도록 안부를 기록했지
하도리 물새들아 종달리 똥깅이야
다음 봄을 기다릴 수 있을지 몰라
야비한 인사말처럼 동굴 문이 닫혔거든
2.
죽음보다 더 깊이 숨고만 싶었을까
관 뚜껑 열 듯이 비집고 들어간 굴엔 할퀴어진 꿈들이 나뒹굴고 있었어
아홉 살 조카야 아시야 형님아 아이고 아주망아 삼춘님 무슨 일이꽈
항아리 가마솥 질그릇 물허벅 곡괭이 도끼 요강에 솥뚜껑 구덕 안경
허리띠까지 아우성 치고 있었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가슴에 묻고 울었을 뿐
3.
눈이 퉁퉁 부은 채로 사십 년에 또 몇 년
고스란히 묻어놓고 흘러갈 줄 알았지
세상 문 열리듯이 동굴 문이 열렸을 때
앙상한 뼛조각에 달려드는 햇살들
근거도 흔적도 없이 빛나지나 말 일이지
열한 개 빈 관들은 헛묘로 떠났을까
곡소리도 죄가 될까 숨죽여 울던 바다
그 바다 한가운데 흩뿌려진 넋들이
단 한 번 거르지 않고 손톱달로 뜬 거 봐
*시 : 계간 『제주작가』 2022년 여름호(통권 77호)에서
*사진 : 2022년 4월 9일 다랑쉬굴 예술제 '봉인' 현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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