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줄탁 - 김정원
하늘의 갈색 섬 매 한 마리가
내리꽂히기 직전, 강변 갈대숲에
오금이 저리는 뱁새들처럼
겨우내 땅속에 노랗게 웅크린
생명들
톡,
톡,
지구알 속에서 신호를 보낸다
음파 탐지기같이 하늘 어미가
그 신호의 출처를 찾아서
봄빛 부리로,
탁,
탁,
쪼아 환하게 통로를 내주자
이윽고 삐약삐약
천지에 가득한 새싹들의 가락
갈망은 소통을 부르고
소통은 봄날을 부화한다
♧ 거미줄 – 이비단모래
저 견고한 간극
어머니 길쌈하던 그 밤
고된 시집살이 씨줄로
술 취해 비틀거리는 남자 날줄로
참아야 되는 인생 틀에 걸고
북 감고 바디 걸어
삶 무늬 짜듯
저 거미
신비롭게
줄 하나 빠지지 않고
간격마저 놓치지 않아
허공에 짓는 운명
직녀였는지 거미는
걸려라 사랑
움직일 수 없게 감아
바람 속에 놓아두겠네
다시는 놓치지 않겠네
자꾸 비껴가던 내 사랑
걸리기만 해라
곁에 두고 오래 오래 눈부시곘네
♧ 노부부 - 황현중
노부부가 길을 걷고 있다
서로의 손 꼭 부여잡고 껴안듯이
나란히 천천히 한 몸으로
한 몸 되는 방법 어렵고 불편했지만
둘로 사는 것 이제 불가능하다
할아버지 귀먹고
할머니 눈멀었다
할아버지의 귀는 할머니의 입으로 살았고
할머니의 눈은 할아버지의 발로 살았다
- 괜찮아?
- 괜찮아!
괜찮은 날들이었다
추워도 따뜻하지 않을 뿐이었고
어두워도 밝지 않을 뿐이었다
한 몸으로 살아서 불가능한 게 또 있다
노부부는 영원히 죽지 않는단다
서로에게 죽음을 양보하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의 보지 못하는 눈을 두고
당신의 듣지 못하는 귀를 두고
내가 먼저 갈 수 없기 때문이다
밥상마다 눈먼 할머니 숟가락에
그렁그렁 버무린 할아버지 눈물 오르고
밤마다 심장병 앓는 할아버지 등에
고통을 밟는 할머니의 발 노래 얹힌다
노부부의 한 몸 안에
죽어도 죽지 않을 미륵 한 분 살고 계시다.
♧ 범종의 기원 - 손창기
범종에도 음향을 조절하는 혀가 있다
누군가 밖에서 당좌撞座를 얼얼하게 칠 때
종소리가 빠져 나가기 전
공명이 제자리를 휘돌아
속을 확- 까뒤집어 놓는 것,
소리가 금방 새어 나가지 않는 건
공기의 틈새를 여닫는 혀에 달려 있다
종의 입 속으로 손을 넣어 본다
혀가 위로 오목하게 만져진다,
혀가 짧은데 울림은 더 멀리 퍼져 나간다
그대 사랑한다고 마음껏 소리 지를 때
그대 사랑한다는 말 감추고 싶을 때
소리에 색깔이 묻어나고,
구슬프고 은은하게 그대의 눈에 보이려고
소리들이 몸에 새겨지는 곳
혀를 내밀어, 겹쳐진
두 음의 굴곡을 오래 간섭하는 일이여
♧ 그림자이고 싶은 이유 – 김미외
따뜻하다가 뜨거운 숨결 내뱉는 태양에게
꾸덕꾸떡한 심장 말리지 못하는
바람 같은
툭툭 제 울음 건드리다
누군가 불러도 돌아보지 않고
멈추지 못하는 걸음으로
등 떠밀리듯 사라지는
바람 같은
그대
잠시
그늘에 앉아
끈적한 슬픔 잘라
내게 붙여 놓고 가기를
* 월간 『우리詩』 2022년 8월호(통권 410호)에서
* 사진 :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의 빙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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