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술벗 하나 떼어놓고
공직에 들어서면 임지가 고향이라지
갓 제대한 이 선생
첫 부임한 저청중학교
산골엔 버스도 막막 관사에서 지냈다지
저지오름 산 그림자
머뭇머뭇 퇴근 무렵
늦눈 두어 송이 점방 앞을 지나는데
저만치 어느 학부형 “한 잔 헙주” 하는 거라
그 말에 맘이 동해
“쇠랑 매어뒁 옵서”
“우린 이미 대작해시난 저만 혼자 갈 텝주”
쇠잔등
탁 치자마자
터덜터덜 가는 거라
♧ 죽절초
3년에 한두 차례 눈이 올까 날까 한다는
서귀포 보목마을 눈이 엔간 쌓인 아침
누굴까, 푸른 잎새에
빨간 열매 얹은 이는
♧ 고추잠자리 19
그냥 한 번 부서지고 돌아서는 파도처럼
추석날 몰래 왔다 돌아서는 파도처럼
어머니 숨비소리로 돌아서는 파도처럼
그래도 서너 마리
하늘하늘 남아서
섬 한 번 오름 한 번 리사무소 지붕도 한 번
종지윷 허공에 뜨듯
엎억뒈싹* 하는 판
실로 눈부신 건 세상에 살아있는 일
이집 저집 다독다독
봉분들도 다독다독
날개 끝 실린 내 고향 금빛으로 사무친다
---
* 제주에서 윷놀이할 때 윷가락이 엎어지고 뒤집히는 모습을 이르는 말.
♧ 고추잠자리 20
뒤끝이 그게 뭔가
맑디맑은 이 가을날
벌초가 끝났는데도 성가시게 어정어정
세상은 할 말 다 하고 가는 게 아니잖나
낸들 안 묻히겠나
가야 또 오는 세상
근데, 근데 말이야 딱 한 가진 훔쳐 갈래
이승의 휴대폰 하나 그것만은 허하시라
거짓말 거짓말같이 창공에 섬이 뜨면
봉분인지 섬인지 성가시게 어정어정
고향길 사위다 못한 울음마저 금빛이네
♧ 보말과 게들레기*
이쯤에 와 내 결론은 ‘져주면 지는 거다’
휘둘릴 만큼 휘둘렸고
떠밀릴 만큼 떠밀려 봤다
밀물과 썰물의 경계, 거기도 싸움터다
이 세상에 집 한 채 못 갖고 온 게들레기
내 고향 위미바다 발톱 세운 파도같이
보말이 집 비운 사이
슬그머니 들앉는다
그렇게 훔쳤으면 그걸로 끝내야지
데닥데닥 갯바위
인기척만 들려도
별똥별 뛰어내리듯 몸 던지는
게들레기
---
* 고둥과 집게의 제주어.
* 오승철 시조집 『사람보다 서귀포가 더 그리울 때가 있다』 (황금알, 2022)에서
* 사진 : 필리핀의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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