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오승철 시조집 ‘사람보다 서귀포가 더 그리울 때가 있다’(8)

김창집 2022. 8. 18. 00:30

 

술벗 하나 떼어놓고

 

 

공직에 들어서면 임지가 고향이라지

갓 제대한 이 선생

첫 부임한 저청중학교

산골엔 버스도 막막 관사에서 지냈다지

 

저지오름 산 그림자

머뭇머뭇 퇴근 무렵

늦눈 두어 송이 점방 앞을 지나는데

저만치 어느 학부형 한 잔 헙주하는 거라

 

그 말에 맘이 동해

쇠랑 매어뒁 옵서

우린 이미 대작해시난 저만 혼자 갈 텝주

쇠잔등

탁 치자마자

터덜터덜 가는 거라

 

 

 

죽절초

 

 

3년에 한두 차례 눈이 올까 날까 한다는

 

서귀포 보목마을 눈이 엔간 쌓인 아침

 

누굴까, 푸른 잎새에

 

빨간 열매 얹은 이는

 

 

 

고추잠자리 19

 

 

그냥 한 번 부서지고 돌아서는 파도처럼

추석날 몰래 왔다 돌아서는 파도처럼

어머니 숨비소리로 돌아서는 파도처럼

 

그래도 서너 마리

하늘하늘 남아서

섬 한 번 오름 한 번 리사무소 지붕도 한 번

종지윷 허공에 뜨듯

엎억뒈싹* 하는 판

 

실로 눈부신 건 세상에 살아있는 일

이집 저집 다독다독

봉분들도 다독다독

날개 끝 실린 내 고향 금빛으로 사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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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에서 윷놀이할 때 윷가락이 엎어지고 뒤집히는 모습을 이르는 말.

 

 

 

고추잠자리 20

 

 

뒤끝이 그게 뭔가

맑디맑은 이 가을날

벌초가 끝났는데도 성가시게 어정어정

세상은 할 말 다 하고 가는 게 아니잖나

 

낸들 안 묻히겠나

가야 또 오는 세상

근데, 근데 말이야 딱 한 가진 훔쳐 갈래

이승의 휴대폰 하나 그것만은 허하시라

 

거짓말 거짓말같이 창공에 섬이 뜨면

봉분인지 섬인지 성가시게 어정어정

고향길 사위다 못한 울음마저 금빛이네

 

 

 

보말과 게들레기*

 

 

이쯤에 와 내 결론은 져주면 지는 거다

휘둘릴 만큼 휘둘렸고

떠밀릴 만큼 떠밀려 봤다

밀물과 썰물의 경계, 거기도 싸움터다

 

이 세상에 집 한 채 못 갖고 온 게들레기

내 고향 위미바다 발톱 세운 파도같이

보말이 집 비운 사이

슬그머니 들앉는다

 

그렇게 훔쳤으면 그걸로 끝내야지

데닥데닥 갯바위

인기척만 들려도

별똥별 뛰어내리듯 몸 던지는

게들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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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둥과 집게의 제주어.

 

 

 

            * 오승철 시조집 사람보다 서귀포가 더 그리울 때가 있다(황금알, 2022)에서

                                        * 사진  : 필리핀의 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