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정복언 시집 '내게 거는 주술'의 시(5)

김창집 2022. 10. 29. 00:18

 

소멸을 꿈꾸며

 

 

나 이쯤에서

저녁 종소리 등에 지고

저벅저벅 걷고 싶네

 

혼자는 외로워

평생 귓속에 절어 든

울음들, 반들반들 닦아

등줄기 땀 흐르도록 짊어지고

서산을 넘고 싶네

 

화창한 날

가슴에 모아둔 여린 풀꽃들

다 꺼내, 어린 추억들마저

모두 태워버리고

 

방금 돋은 날개로 높이 오르는

맑은 종소리 끌어안은 채

허공으로 화르륵 소멸하고 싶네

 

 

 

그러려니

 

 

제 세상인 듯

허공을 찢어대던 매미 울음

가을 등에 업혀 가고

 

어둠을 흔들며

쉼 없이 목소리 다듬는

풀무치의 하루

솔바람 타고 노닐 때면

 

춥고 배고팠던 시절이

소리 없이 다가와

기억하냐고 눈을 말똥거리네

 

옷소매로 콧물 훔치던

조무래기 얼룩진 얼굴도

그런 시절이라 그러려니 했었네

 

머언 길 돌고 돌아

편한 세상 짊어져도

끙끙거리는 사람들 틈에서

그러려니 하고 또 하루를 건너네

 

 

 

눈사람

 

 

너나없이

한파에 웅크릴 때

내 눈은 번쩍 뜨이지

별난 놈이라고 말하지 마시게

햇빛에 절망하는 몸이라오

단명이 집안 내력이지만

선 자리에서 몸을 태우는

이도 성불 아닌가

 

태우다 남을 영혼이 사리

작은 돌멩이 하나 엎드렸거든

걷어차지 마시게

누구에게나 단단한

생의 옹이는 귀한 거라네

 

눈물로 살을 불사르고

그 자리에서 한 생을 바친

수도자의 물그림자 하늘을 덮네

 

 

 

오름

 

 

보드라운 능선이

물결로 일렁이네

 

저 선을 얼마나 쌓으면

어머니 품이 될까

 

마음 시린 날 어서 오라며

먼빛으로 실피시고

 

그리워 다가서면

푸근히 껴안아

그렁그렁한 눈가를

닦으시고, 닦으시고

 

 

 

내게 거는 주술

 

 

호수에 안긴 하늘 미안한 얼굴 보시고

늙은 가지에 안긴 새들의 미소도 보시게

이승의 한낮은 육탈을 예언하는 시간

지는 꽃의 순한 유서를 읽으시고

착한 나무 선 채로 기도하는

천년의 세월을 가늠해 보시게

슬픔이 기쁨을 호출하는 삶의 쳇바퀴

알 듯 말 듯 오름은 능선을 이루고

날 것들의 생피를 안타까워하는

녹음 짙은 계곡의 탄식을 들어 보시게

가을날 은행잎 쏟아지는 사랑의 허망을

심장으로 느끼며

잠들지 않고 부르는 시간의 자장가에

곤히 잠들어 보시게

투박하고 성긴 나의 시는 흙의 거름으로 쓰시게

혹시 움트는 싹이 손 내밀거든 후하게 덮어 주시고

땅이 메마르기 전 물도 뿌려주시게

사는 게 그런 거라고 속된 말을 거두시고

바닥에 무릎 꿇고 천지 더럽힌 일 참회하시게

 

 

                           * 정복언 시집 내게 거는 주술(정은출판, 2022)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