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별들이 쪽잠을 자고 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기령 풀숲에는
별들이 쪽잠을 자고 간 방이 있습니다
투명하고 둥근, 그 작은방을 내 어릴 적
한 분은 이슬방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슬방이 아니면 자고 갈 수 없는, 별은
맑은 물의 산천어처럼
미리내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밤늦도록 반짝이는 별의 수고로움에
새벽잠 잠시 눈 붙이게 하는,
이슬방울은 4월 풀숲의 정성입니다
곰취, 쇠뜨기, 억새잎에 일찍 산책 나온
맨발의 개미는 발이 젖어도 즐겁습니다
별이 몸을 헹구고 간 이슬이기에
늘, 아련한 그 분의 몸 향기가
풀숲에서 번지는 까닭도
지금은 은하의 별이 되신 때문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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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령 – 동해시에서 정선군 임계면 사이의 백두대간 고개
*미리내 – 은하수의 우리말
♧ 겨울 야영
등불을 꺼야겠다
바람이 불어서가 아니다
산중의 길 모두 지워져
기다려도 올 이 없는 이 눈밭
봄을 멀리 둔 내 마음의
흔들리지 않는 별을 보고 싶어서다
♧ 산새
산새에게는 잃어버릴 길이 없습니다
길이 없는 산새가
노각나무에 앉아있습니다
노각나무는 산새의 길 아래 서 있고
산새는 길 위에 앉아있습니다
길 위에 앉아있는
산새는 길이 없습니다
눈 내리는 산자락
땅 위의 길들 하얗게 지워져도
지워지지 않는 산새의 길
뼈 속까지 아린 추위에도 시를 읊는
가지고 있지 않기에
잃어버릴 길이 없는,
산새는 자유롭습니다
♧ 그대 새벽의 잔별들도
초생달, 부신 보습날로 한창
어두운 하늘 갈아엎는 이여!
녹슨 펜대를 괭이 삼아, 한자 두자
누렇게 바랜 원고지 이랑마다 뿌려놓은
어설픈 내 시詩의 씨앗처럼
그대 새벽의 잔별들도
차마, 전하지 못한 그 무엇의 씨앗입니까
지금 막
품종이 다른 씨앗 하나
은하의 저편으로 내던져지고 있습니다
♧ 어느 날
저물도록 짓까불며 뛰놀던 내가
보이지 않는다면 찾지 마세요
플라타너스 마른 잎
구름 되어 흘러간 운동장 지나
어쩌면, 엄마 찾아 가을밤하늘
건너가고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 권경업 시집 『별들이 쪽잠을 자고 간』 (전망, 200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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