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계간 '제주작가' 가을호의 시들(1)

김창집 2022. 10. 30. 00:07

 

 

제주여자, 순이 - 강덕환

 

 

스무 살 순이의 사랑을 외면할 수 없다.

병원에서 간호부와 환자로 인연이 되었던

국방경비대 장교와의 사랑을 한낱

불장난이거나 치기로 매도할 수 없다.

 

제주도민 학살 명령 출동을 거부하여

반란군을 지휘했던 함경도 청년과

단선단정 거부의 땅에서 태어난

제주도 처녀, 남녀북남으로 만나

애초부터 혁명적 동지는 아닐지라도

그들의 사랑은 묶인 분단의 사슬에서

단단하고 야물어지고 있었겠지.

 

작지만 단발머리에 스카프를 날리며

토벌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여

체포하거나 살해한 자에게

거금의 현상금이 걸렸지만

그들의 사랑은 결국 지리산 뱀사골

글러버린 한 순간 조각난 꿈이었을지라도

 

스물의 순이와 스물다섯의 회

몇 번이나 넘었을까, 지리산 골짜기

몇 번이나 맞았을까, 동트는 새벽

그 꿈 남과 북, 여순과 제주에 새겨지기까지

그 불멸의 혁명적 사랑을 믿기로 한다.

 

 

 

물허벅 강봉수

 

 

우리 집에는

하루에도 몇 번 달이 뜬다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어머니는 땅 속을 뚫고 솟는 용천에서

달을 길어오셨다

 

어머니 허벅에는 보름달이

누이의 허벅에는 초승달이

찰랑찰랑 노래하며 따라와서는

온 집안을 환히 밝혀 주었네

물허벅 지던 그때는

온 섬이 달빛으로 가득했네

 

 

 

 

이좌구 김경훈

    -이덕구의 작은형

 

절대로 43 때문에

더 이상의 희생이 있어서는 안 된다.

통일 돼서 우리 조선 사람이

다 같이 잘 살아야 한다.

그것이 지상 명제다.

지금 물리적 38선은 있어도

내 가슴에 분단은 이미 없다.

형편이 되거든 43으로 죽어간

모든 사람들의 무덤 자리 마련하고

풀 한 포기 베어달라.

우리 집안의 일은

인민들의 일을 다 본 후에 해도 늦지 않다.

나 죽거든 뼈 한 줌

한라산 기슭에 묻어 달라.

제주의 흙이 되어 천년만년

인민들에게 사죄하고 싶다.

 

 

 

얼굴들 김병택

 

 

  겨울날 아침, 내게 장작을 패는 일이 주어졌다 뒤뜰에 널브러진 뭉텅한 시간들이 언제든지 함께 찍힐 태세로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도끼를 잡은 오른손으로 나무토막을 힘껏 내리찍은 뒤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저쪽에서 내게로 다가오는 꽤 익숙한 얼굴을 보았다 나는 또 얼어붙은 공기를 헤치며, 팬 장작을 창고로 옮기기 위해 허리를 약간 구부렸다 폈다 하는 동작을 반복하기도 했는데, 그때는 다른 얼굴이 바로 내 옆에서 그런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잠시라도 나와 마주하기를 기대했을 것 같은 또 다른 얼굴들에 대해서도 말해야 하리라 그것은 최소한 한 자리를 넘는 숫자였다 내가 패야 할 장작 분량이 엄청났으므로, 나는 다가오는 또 다른 얼굴들과 일일이 마주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또 다른 얼굴들을 모조리 내 머릿속에 담아 두었다 내가 열중하는 작업이 바로 얼굴들을 관찰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박주가리 김순남

 

 

늙은 할망들 신앙 속에서만 사는 줄 알았지

세상의 문밖을 오래 전에 빠져나갔으려니

영악한 21세기엔 얼씬도 못하고

영영 오지 않을 거

애초에 신화는 황당한 시나리오에 불과해

아무거나 잡으면 칭칭 휘감기는 팔뚝 힘에

간댕이 팅팅 부어 오른 줄을 몰랐지

 

꽃밭에는 꽃만 있고

먼데는 먼 산만 아련하고

하늘엔 구름만 떠 다녔다네.

 

유유히 떠가는 흰 구름자락에

누군가의 간절함이 까치발 모가지를 늘여도

사는 동안 고르고 밀치고 가둬버린 소소한 것들이

완벽한 히스토리가 되어

먼 산기슭이고 꽃잎 혹은

골목 어디쯤 담벼락 적시며

숨소리 팔락거리고 있었던 것을

다 살고난 이제야 알게 되다니

단단한 씨방이 터지고

가벼이 날아가는 씨앗을 바라보며

나의 어리석음이 부끄러움에 낯을 붉힌다

 

 

                          *계간 제주작가2022년 가을호(통권78)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