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김정순 시집 '늦은 저녁이면 어때'의 시(5)

김창집 2022. 11. 14. 00:26

*흰 애기동백꽃

 

 

변방邊方

 

 

생명의 근원지로 부여받은 나신裸身

저 등판은 분명 흰 천을 깔고

옥양목 자갈을 물고

금쪽같은 비린 알을 낳아

품었으리라

지느러미가 찢기어 잘리어도

껴안아 품을 수밖에 없는

그 비린 말 존재

바닥에 낀 이끼 속으로

은비늘 한 닢 밀어 넣으니

무시로 새김질하여

올라오는 소금 맛,

벌겋게 익어가는 종아리,

그 문장을 따라가

바닷물에 절인 기억들을

해수 더운 물에 풀어 녹이네

쌉싸름 도라지 삶을 살아온

화무십일홍,

유일한 쉼표의 시간 앞에

서 있는 나신은

그지없이 파식되어 살아지는

시간들을 쓸어 모으네

 

 

 

 

울산바위

 

 

시도 때도 없이

헤실대는 소나기

은 안개 손짓 따라

하늘을 유영하는 울산바위

화진포 해변에서

회색 바람 몰아

거진 등대 다시 돌아

짓궂은 산이

빚어놓은 비탈길을

한달음에 달려와

설악의 둘레길

청송이 짙은 그늘 아래

수묵화로 누웠다

 

 

 

 

서리, 너 오는 소리에

 

 

허리 감던 단풍잎 하나 입술에 틀만 남았어

 

곤을동 갯바위에서 담금질하던 퇴색의 계절도

절로 비워야 할 시간인가 봐

 

수평선 어깨 지키던 붉은 노을

이별을 녹여낸 도두봉에 올라

발등 위로 떨어지는 콧물 훔치니

노을이 흐물거려

 

서리야, 그러니 서둘지 마라

나 어제 풀었던 가슴 옷고름 여미는 중이라

 

한물 지난 나에게 하늘색 달개비 꽃향기

어디 두고 왔느냐 물어보지 마라

 

다리품 드는 걸에서 다 온 자리에 앉아

가을 단풍 지금 손 저리게 붙잡고 있어

 

 

 

 

가을을 탄다

 

 

돌담 사이 산물이 흐른다

귤 가지 끝에 허한 낮달

물오른 가지 하나 꺾는 소리

 

이파리에 묻혀 꼭꼭 숨는 산물

너울지게 소매 걷은 아낙네 놉들,

장 담그던 손들, 허투루 할 수 없는

한 손에 알맞은 네 개의 방울

꼭 그러쥐니

파르르 낯선 산새 산을 넘는다

 

새콤달콤 맛 들어 자란 방울,

허공을 찢어 몸을 푼다

 

빈 가지 가붓가붓 하늘 위로

날아간다

고수레 까치밥 왕방울 하나

행여 들킬까,

바람 뒤에 숨는 샛노랑 가을

 

 

 

 

마음 하나

 

 

어머니가 친 울타리에 어머니 혼자

살고 있습니다

 

문밖 세계와 담장 쌓아도 그 안에 위로가

기다리고 있는지

바다가 가득한 눈으로 풍장처럼

야위어가는 마늘을 깝니다

 

마음과 마음이 마주할 마음 하나 있으면

좋겠다 하면서

 

침 섞인 물컵 함께 먹는 마음 하나 있으면

좋겠다 하면서

 

홀로 지키는 TV,

보다가 자다가, 보다가

가야 하나 봐

 

하늘 벽에 걸어 놓은 스무아흐레 달이

오늘 밤도 별을 밀어내고 있습니다

 

 

                       *김정순 시집 늦은 저녁이면 어때(메이킹 북스, 2022)에서

                                      *사진 : 요즘 한창인 흰애기동백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