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변방邊方
생명의 근원지로 부여받은 나신裸身들
저 등판은 분명 흰 천을 깔고
옥양목 자갈을 물고
금쪽같은 비린 알을 낳아
품었으리라
지느러미가 찢기어 잘리어도
껴안아 품을 수밖에 없는
그 비린 말 존재
바닥에 낀 이끼 속으로
은비늘 한 닢 밀어 넣으니
무시로 새김질하여
올라오는 소금 맛,
벌겋게 익어가는 종아리,
그 문장을 따라가
바닷물에 절인 기억들을
해수 더운 물에 풀어 녹이네
쌉싸름 도라지 삶을 살아온
화무십일홍,
유일한 쉼표의 시간 앞에
서 있는 나신은
그지없이 파식되어 살아지는
시간들을 쓸어 모으네
♧ 울산바위
시도 때도 없이
헤실대는 소나기
은 안개 손짓 따라
하늘을 유영하는 울산바위
화진포 해변에서
회색 바람 몰아
거진 등대 다시 돌아
짓궂은 산이
빚어놓은 비탈길을
한달음에 달려와
설악의 둘레길
청송이 짙은 그늘 아래
수묵화로 누웠다
♧ 서리, 너 오는 소리에
허리 감던 단풍잎 하나 입술에 틀만 남았어
곤을동 갯바위에서 담금질하던 퇴색의 계절도
절로 비워야 할 시간인가 봐
수평선 어깨 지키던 붉은 노을
이별을 녹여낸 도두봉에 올라
발등 위로 떨어지는 콧물 훔치니
노을이 흐물거려
서리야, 그러니 서둘지 마라
나 어제 풀었던 가슴 옷고름 여미는 중이라
한물 지난 나에게 하늘색 달개비 꽃향기
어디 두고 왔느냐 물어보지 마라
다리품 드는 걸에서 다 온 자리에 앉아
가을 단풍 지금 손 저리게 붙잡고 있어
♧ 가을을 탄다
돌담 사이 산물이 흐른다
귤 가지 끝에 허한 낮달
물오른 가지 하나 꺾는 소리
이파리에 묻혀 꼭꼭 숨는 산물
너울지게 소매 걷은 아낙네 놉들,
장 담그던 손들, 허투루 할 수 없는
한 손에 알맞은 네 개의 방울
꼭 그러쥐니
파르르 낯선 산새 산을 넘는다
새콤달콤 맛 들어 자란 방울,
허공을 찢어 몸을 푼다
빈 가지 가붓가붓 하늘 위로
날아간다
고수레 까치밥 왕방울 하나
행여 들킬까,
바람 뒤에 숨는 샛노랑 가을
♧ 마음 하나
어머니가 친 울타리에 어머니 혼자
살고 있습니다
문밖 세계와 담장 쌓아도 그 안에 위로가
기다리고 있는지
바다가 가득한 눈으로 풍장처럼
야위어가는 마늘을 깝니다
마음과 마음이 마주할 마음 하나 있으면
좋겠다 하면서
침 섞인 물컵 함께 먹는 마음 하나 있으면
좋겠다 하면서
홀로 지키는 TV,
보다가 자다가, 보다가
가야 하나 봐
하늘 벽에 걸어 놓은 스무아흐레 달이
오늘 밤도 별을 밀어내고 있습니다
*김정순 시집 『늦은 저녁이면 어때』 (메이킹 북스, 2022)에서
*사진 : 요즘 한창인 흰애기동백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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