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새에게는 잃어버릴 길이 없습니다
산새에게는 길이 없습니다
길이 없는 산새가
노각나무에 앉아있습니다
노각나무는 산새의 길 아래 서 있고
산새는 길 위에 앉아있습니다
길 위에 앉아있는
산새는 길이 없습니다
눈 내리는 산자락
땅 위의 길들 하얗게 지워져도
지워지지 않는 산새의 길
뼈 속까지 아린 추위에도 시를 읊는
가지고 있지 않기에
잃어버릴 길이 없는, 산새는 자유롭습니다
♧ 별은 뜨지 않을 것이다
그대들의 도시에서
별은 뜨지 않을 것이다
오늘 별들의 겨울총회가 있다
큰별, 작은별, 아기별,
꼬리에 꼬리를 문 꼬리별
전갈좌, 큰곰자리, M29성좌
추억으로도 목측目測되지 않던
아득한 그리움의 별까지
별의별, 별 희한한 별들이 다 모여
돌아가지 않을 것을 결의하였다
지금 지리산 장당골에서
그나마 남아있던 몇 별마저 떠나오고
네온이 어지럽게 밤을 밝힌
그대들의 도시는, 벌써
오래 전부터 암담하였다
♧ 숫눈길의 발자국
새들도 깨어나지 않는 이른 새벽
이렇게도 긴 사연을, 또박또박
남 몰래 쓰며 숲으로 간 이여!
그대의 편지를 읽어가다 보면
산벚나무 아래 잠시 발걸음 멈춘
그대가 시인임을 알겠습니다
‘어쩌겠습니까, 눈 덮인 산비탈
맨몸, 맨발로 서서
여린 꽃잎 아롱아롱
눈물처럼 당도하고야 말 봄날
그 봄날 같은 누군가를
떨며 기다리는 내 마음도 그렇다며’
♧ 눈 내리는 날
세상이 우울하면, 하늘은
지상의 먼 곳까지 위문편지를 보내옵니다
이 땅의 가장 낮은 곳에서는, 종일
진정한 부자들이 그 소식에 즐거워하며 다가와
경배의 허릴 굽히고 총총히 물러서는
구세군의 자선냄비 위로
네온 등 꺼져버린 낯선 도시의 뒷골목을
비틀거리며 서성일 이들이여!
이 저녁, 실향失鄕의 싸늘한 허기에
훌훌, 더운 김 솟는
시락국 한 그릇이라도 드셨느냐며
♧ 거리距離
툭 투둑 툭
도토리가 떨어진다
흔들리며 여물어가던 그곳과
떨어져 나뒹구는 땅까지의 거리
돌아갈 수 없는, 시차視差
무한대다
* 권경업 시집 『하늘로 흐르는 강』 (작가마을, 2008)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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