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범섬
1
산이 섬을 낳고
섬이 산을 낳아
전설도 가라앉은
서귀포 앞바다에
은장도
퍼런 날 세워
정절을 지킨 벼랑
2
엎드린 등성이에
들꽃은 피고지고
마파람 머물다 간
일렁이는 억새숲엔
도요새
물고 온 귤향
수묵화로 번진다
3
언어란 사치스런
변명의 조각임을
다 알고 입 다문 채
시간마저 삼켰다가
안개 낀
새벽에 깨어
울부짖는 섬이여
♧ 무인도
산이 절로 높아야
물이 멀리 흐르듯
침묵이 오랠수록
자비는 깊어지는가
파도에
제살을 깎아
좌선하는 수도승
사람이 모여 살까
샘물 하나 없이 하고
인간의 언어 따윈
아예 모른 바닷새를
무언의
긴 설법으로
날게 하고 잠들게 하고
언어가 없는 곳에
그리움이 어찌 있으랴
바위틈 갯메꽃은
보는 이 없이 피었다 지고
고독은
타고난 죄업
인간만의 굴레인 걸
온 곳도 갈 곳도 모르는
나는 또 무엇인가
마음밭 갈지 않아
들꽃 하나 피우지 못한
둥둥 떠
뿌리조차 없이
흘러가는 섬이네
♧ 다려도
1
섬도 물도 아니어서
여라고 하는 걸까
바람에 지워질 듯
여덟 개 점으로 찍혀
태공들
무념의 낚시를
물고 아니 놓는 섬
2
보고도 가지 못하는
눈앞의 북촌 마을
파도를 베고 누우면
둥둥 떠 밀려나 갈까
달려도
다시 달려도
제자리인 다려도
3
뿌리 굵은 후박나무
바위도 삭힌 돌밭
갯메꽃 질긴 삶은
짠물에도 붉게 피고
도요새
비운 둥지엔
체온 아직 따습다
♧ 내 마음의 바다
다가가 밀물이거나
돌아서 썰물일 때도
항상 그 깊이
그 높이로 노래했거는
그대를
가슴에 넣으면
현악기로 떠는 바다
파도야 내가 언제
내 가슴을 친다 했나
모랫벌 깊이 묻은
상처까지 붉게 덧나
하루를
부둥켜안고
타악기로 우는 바다
♧ 귀덕 포구
한 해가 저물어도
돌아갈 곳 없는 사람은
주저 말고 귀덕 포구*
돌담 위에 서 보아라
천상병**
하늘로 가듯
바다로 가보아라
밀물이면 바다인
작은 여를 바라보며
모든 걸 안아주고
어떻게 감싸는지
작은 배
안고 잠재운
방파제 되어 보라
---
*제주시 한림읍 귀덕리의 작은 포구.
**돌아가신 천상병 시인의 ‘귀천(歸天)’을 생각하며
* 고성기 시집 『이제 다리를 놓을 시간』(한그루, 2022)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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