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월간 '우리詩' 11월호의 시(3)

김창집 2022. 11. 13. 01:52

 

 

유혹을 떨치다 임영희

 

 

가을비 내리는 날 퇴근길에는

막걸리 한 잔에 천 냥이라는

치마 두른 팻말에 구미가 당긴다

출출한 차에 덥석 미끼를 물면

술이 떡이 되도록 부어라 마셔라

불길한 징조가 다분하겠다

딱 한 잔의 유혹에 눈 한 번 질끈 감고

가던 발걸음을 재촉할 일이다

돼지고기 숭덩숭덩 썰어 넣어

얼큰한 김치찌개 끓여 놓고

이제나저제나 제 서방을 기다리는

흰머리 늘어가는 아내가 있다

싸늘한 가을비 내리는 저녁

소박한 식탁에 마주 앉아서

소주 한 병 오순도순 나눌 일이다

오랫동안 부부의 곰삭은 정으로

하룻밤 만리장성 쌓아 볼 일이다

 

 

 

 

반송 정성수

 

 

시집을 보냈더니 돌아왔다

 

다시 보내야 하나

한참을 생각했다

 

돌싱으로 사는 세상

만만치 않을 텐데

방구석에 처박혀 있으면

폐품일 뿐인데

 

불쌍한 것

다시 시집 보내야겠다

 

 

 

 

포리똥* 간짓대 - 김성중

 

 

맘껏 따먹으라고 해서

입맛만 다시며

어떻게 딸까 궁리만 하다가

 

곤충채집망을 쭉 늘여서

포리똥을 따려고 했으나

녀석은 끈질기게 버텼네

 

대문에 세워둔 대나무 끝을

쪼개고 쐐기를 박아

간짓대를 만들어서

가지를 꺾었네

 

달짝지근하고 떨떠름한 포리똥을

잠자기 전에 다 먹어버리고는

나는 밤새 더 지혜로워졌네

 

나는 호모 파베르

나는 호모 루덴스

나는 호모 파덴스

 

---

*포리똥 : 뜰보리수 열매.

 

 

 

 

선인장 - 이규홍

 

 

평생 가시를

몸에 두르고 살지만

누군가를 찌르려고

칼을 찬 무사가 아니다

살다 보면 사막이란

어느 곳에나 널려 있어

홀로 걷기 힘든 때가 온다

그때, 기다란 가시 끝에

한 송이 붉은 꽃을 피우고

푸른 잎 나부끼면서

함께 걸어갑시다

따뜻한 눈빛으로

두 손을 내밀면

사막을 동행하는 사람은

누구나 친구가 되고

천상을 걷는

신선이 되는 것이다

 

 

 

 

스승과 제자 - 민문자

 

 

팔순이 내일모레인 제자 넙죽 절하니

초임교사 시절 그 환한 미소 그대로

모란꽃 얼굴 두 손 맞잡아 일으켜주시네

68년 전을 떠올리며 그 시절 학교 풍경에

노란 머리 얌전했던 소정을 기억하시네

 

어린 시절 수많은 스승 다 어디 가셨는지

철들자 노망든다던가 너무 늦은 깨우침

이제야 스승님들 안부가 궁금한데

구순이나 팔순이나 도긴 개긴 황혼열차에서

오직 한 분 만나 뵙는 행운 반가워라

 

스승님 소녀처럼 상기된 얼굴 감격에 겨워

또 만나자 자주 만나자 귀가 후 바로 전화 주셨네

오늘 날짜를 기록해 놓으셨다네요

그래요 해마다 음력 유월 스무하루는 잊지 않아요

선생님 오래 사세요 행복하세요 건강 조심하세요

 

 

 

                               * 월간 우리202211월호(통권 413)에서

                                     * 사진 : 감(2022. 11. 11. 제주시 도남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