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혹을 떨치다 – 임영희
가을비 내리는 날 퇴근길에는
막걸리 한 잔에 천 냥이라는
치마 두른 팻말에 구미가 당긴다
출출한 차에 덥석 미끼를 물면
술이 떡이 되도록 부어라 마셔라
불길한 징조가 다분하겠다
딱 한 잔의 유혹에 눈 한 번 질끈 감고
가던 발걸음을 재촉할 일이다
돼지고기 숭덩숭덩 썰어 넣어
얼큰한 김치찌개 끓여 놓고
이제나저제나 제 서방을 기다리는
흰머리 늘어가는 아내가 있다
싸늘한 가을비 내리는 저녁
소박한 식탁에 마주 앉아서
소주 한 병 오순도순 나눌 일이다
오랫동안 부부의 곰삭은 정으로
하룻밤 만리장성 쌓아 볼 일이다
♧ 반송 – 정성수
시집을 보냈더니 돌아왔다
다시 보내야 하나
한참을 생각했다
돌싱으로 사는 세상
만만치 않을 텐데
방구석에 처박혀 있으면
폐품일 뿐인데
불쌍한 것
다시 시집 보내야겠다
♧ 포리똥* 간짓대 - 김성중
맘껏 따먹으라고 해서
입맛만 다시며
어떻게 딸까 궁리만 하다가
곤충채집망을 쭉 늘여서
포리똥을 따려고 했으나
녀석은 끈질기게 버텼네
대문에 세워둔 대나무 끝을
쪼개고 쐐기를 박아
간짓대를 만들어서
가지를 꺾었네
달짝지근하고 떨떠름한 포리똥을
잠자기 전에 다 먹어버리고는
나는 밤새 더 지혜로워졌네
나는 호모 파베르
나는 호모 루덴스
나는 호모 파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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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리똥 : 뜰보리수 열매.
♧ 선인장 - 이규홍
평생 가시를
몸에 두르고 살지만
누군가를 찌르려고
칼을 찬 무사가 아니다
살다 보면 사막이란
어느 곳에나 널려 있어
홀로 걷기 힘든 때가 온다
그때, 기다란 가시 끝에
한 송이 붉은 꽃을 피우고
푸른 잎 나부끼면서
함께 걸어갑시다
따뜻한 눈빛으로
두 손을 내밀면
사막을 동행하는 사람은
누구나 친구가 되고
천상을 걷는
신선이 되는 것이다
♧ 스승과 제자 - 민문자
팔순이 내일모레인 제자 넙죽 절하니
초임교사 시절 그 환한 미소 그대로
모란꽃 얼굴 두 손 맞잡아 일으켜주시네
68년 전을 떠올리며 그 시절 학교 풍경에
노란 머리 얌전했던 소정을 기억하시네
어린 시절 수많은 스승 다 어디 가셨는지
철들자 노망든다던가 너무 늦은 깨우침
이제야 스승님들 안부가 궁금한데
구순이나 팔순이나 도긴 개긴 황혼열차에서
오직 한 분 만나 뵙는 행운 반가워라
스승님 소녀처럼 상기된 얼굴 감격에 겨워
또 만나자 자주 만나자 귀가 후 바로 전화 주셨네
오늘 날짜를 기록해 놓으셨다네요
그래요 해마다 음력 유월 스무하루는 잊지 않아요
선생님 오래 사세요 행복하세요 건강 조심하세요
* 월간 『우리詩』 2022년 11월호(통권 413호)에서
* 사진 : 감(2022. 11. 11. 제주시 도남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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