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지
눈 푸른 가을 오후
하늘보다 시린 편지를 받다
이제 서른이라 했다
선생님 앞에선 아직도 열일곱이어서 수줍다 했다
까까머리 중학생 앞에서 옛날을 생각하며 알퐁스도데를…
스테파네트의 순수를 가르치다 눈물을 글썽인다 했다
선생님이 목동이었음 그런 꿈도 꾸었단다
애기 엄마 그 스테파네트는 이제 창밖의 벚나무 잎처럼 진다고 했다
시간을
되돌린 오늘
외려 내가 단풍이었다
♧ 나누기
맨 처음 어느 누가
나누기를 알았을까
섬과 섬
남자와 여자
가난과 부자까지
그래서
벌어진 틈에
퍼렇게 싹튼 갈등
뺄셈보다 덧셈으로
깁고 기워도 모자랄 삶
정치가 찢은 자리
누가 두 손 맞잡을까
낮추면
보이는 다리
무지개가 뜰 때까지
♧ 낙타의 눈물
몽골 초원 낙타들은
제 새끼만 젖 물린다
마두금 가는 울림
애절한 주인 노래
눈물을
줄줄 쏟으며
남의 새끼
젖 먹인다
소리가 소리를 만나
기적을 만들었다
모든 공연 취소하고
소녀 병상 찾아가
마지막
소원 들어준
어느 가수의
바람의 노래
♧ 어떤 기적
마음이 아픈 날엔
더 아픈 사람 찾아가라
그 눈물 닦다 보면
하늘까지 맑아지고
구름은
출렁다리 되어
이어줄 걸
두 사람
♧ 사성암 가는 길
왜 이리 가파른가
사성암 가는 길은
숨 가쁘면 하나씩
내려놓으라
내려놓으라
깨달아
절로 합장해도
마주 선 삶의 절벽
유리광전 댓돌에는
기도들이 가지런하다
원효대사 손톱으로 새긴
미륵불 앞에 서면
섬진강 굽이굽이로
화엄경이 흐른다
*고성기 시집 『이제 다리를 놓을 시간』 (한그루, 2022)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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