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월간 '우리詩' 12월호의 시(3)

김창집 2022. 12. 17. 00:54

 

지구 김종욱

 

길고 파랗다

, 사랑과 죽음

담긴 큰 눈은

 

 

 

- 김나비

 

 

오늘은 가벼워질래요

실금 사이로 새는 검은 감정이

적막을 부풀리죠

나는 고랑에 뽑힌 풀처럼 시들어가요

몸속에 숨겨 둔 당신의 체취를 다 발라낼래요

흔들리는 거미줄 입에 물고 껍질만 남은 고동색으로

 

게으른 햇살이 나를 비추면

오후 3, 놀이터에 퍼지는 아이들 웃음소리처럼 모든 것이 아득해요

먼지 속에 부유하는 얼굴이 허공 가득 떠다녀요

부식된 날들의 파편이 날려요

눈을 감고 천천히 누수 된 시간 속 당신을 떠올리죠

낮달처럼 떠 있는 얼굴이 희미하게 기울어요

 

귓속으로 달려오는 귀뚜라미 울음에 눈을 열어요

벌어진 밤송이 후드득 땅을 향해 날고

대추가 홀로 몸 붉히는 폐가 뒤란에

나는 잊힌 간장 독

 

바람이 살갗을 살짝만 건드려도

텅하고 마른 눈물 소리가 날 것 같아요

문득 눈을 들면 이깔나무 잎새

빗물처럼 날리는

 

 

 

실패를 계획하다 서숙희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했지만

실패를 실패하여 성공을 낳지 못하고

으깨진 유전자들만 남아있는 오늘은

 

막다른 절망을 으스러져라 안고서

금간 유리병을 차곡차곡 채우고서

살 오른 실패 하나를 다시 계획하려네

 

심장이 살아 펄떡이는 싱싱한 실패를

붉고 푸른 독이 번진 알몸의 실패를

깨져서 경전처럼 눈먼, 백주 대낮의 실패를

 

 

 

다 끝난 것처럼 말하는 버릇 - 이명선

 

 

  내려다볼 수 있는 미래는 더 먼 미래로 가야 볼 수 있을까 말린 과일을 접시에 담으며 먼저 늙겠다는 네가 어느 순간 늙어 시계가 걸린 벽을 바라보았다 너의 테 없는 안경을 쓰고 양 떼가 이동 중인 초원을 거닐 수 있다면 움트는 새벽을 맞게 될지도 몰라 그간의 일에 슬픔이 빠지고

 

  사람의 손을 네가 먼저 덥석 잡아 줄 리 없으니 내가 아는 너와 지금의 너는 다른 사람일 수도 있겠지만 다시 너에게 오는 사람이 지금의 너를 알아봐 주는 사람이면 좋겠다

 

  나는 살갑게 네가 올려다볼 세상을 상상하면서 조금 더 늙어 버려 식탁에 앉아 말린 과일을 놓고 생애주기가 다른 바다생물 이야기에 벌써 눈부신 멸망을 본 듯 말하고 있다

 

  다 끝난 것처럼 말하는 버릇을 우린 아직 버리지 못해서

 

 

 

퍼즐 맞추기 - 유진

 

 

누가 먼저랄 것 없는 손깍지에

서운했던 스무 해가 접혔다

 

붉을 대로 붉은 칸나는 출가를 했고

만두를 빚던 앵무새는 적을 옮겼대

그래, 그랬구나

연꽃은 오늘도 진흙 속에 피었어

 

세모네모 분홍노랑

, , 꽃들 모두 꽃의 유전자

발붙일 땅 어디서든

궁리대로 정 붙이며 사는 구나

 

꼽을 손가락이 모자라 그리운 얼굴들

펄럭이던 웃음이 선명해진다

 

비었던 계절하나가 완성되었다

 

 

                                *월간 우리2022년 통권 414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