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의 법칙 – 여연
하얀 눈이 내린다고
네가 말한다
까만 눈도 있어?
네 눈이 까매
올라가는 눈도 있어?
네 눈꼬리가 올라가
나는 언제나 딴지 걸고
너는 언제나 딴청한다
씨줄과 날줄에
우리 숨이 머무는데
결이 곤두선다
결이 거칠다는 건
촘촘하게 엮이지 못했다는 것
혹은 어디선가 꼬이거나 얽혀서
제 길을 잃었다는 것
언제든 꼬인 줄 풀고
다시 결대로 엮일 다툼마저 없다면
삶이 얼마나 엉성하겠느냐
그리하여 더 치열하게 얽히기로 했다
♧ 누가 빨간 사과를 만드는가? - 임보
할아버지가 열네 살짜리 손자에게 다시 묻습니다.
“네가 좋아하는 빨간 사과를 누가 만드는 줄 아느냐?”
“그야 농부지요!”
손자는 자신 있게 대답합니다.
“그래? 과수원에서 사과나무를 기르는 농부란 말이지?”
농부가 비료도 주고 전지도 해 주고 하고 과목을 돌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고 할아버지는 손자의 말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말이다!”
할아버진 손자에게 다시 말합니다.
“농부가 없어도 사과나무는 사과를 매단다!”
빗물이 스며들고 햇빛을 받아 꽃을 피우고
벌들이 수분受粉을 해서 열매를 맺게 되는 걸 설명합니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다시 묻습니다.
“비를 오게 하고, 햇빛을 주고, 벌들을 살게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한참 있던 손자가 말합니다.
“해- 태양이란 말씀인가요?”
“그렇구나, 지상의 모든 생명체를 관장하고 있는 존재는 바로 태양이다!”
♧ 맹수들의 齒牙 - 김동호
토실토실 살찐 山羊들
그냥 보내버리는 늙은 호랑이
송곳니가 결딴났기 때문이다
예쁜 물개를 입맛만 다시다가
그냥 보내버리는 늙은 악어
어금니가 망가졌기 때문이다
늙은 맹수들의 이빨
齒牙 아니다. 齒 아- 이다
♧ 엽서 - 김완
1
코로나가 엄중해져가는 자카르타에 가 있는
친구가 마지막 한 달을 버텨야 하는데
너무 힘들다고 백만 원만 도와달라고 하네
백만 원이 그저 만들어지는 돈이 아님을
잘 알 텐데 돈을 보내는 것이 친구에게
좋을 것인지 3일을 고민하다가 돈을 보냈네
백만 원은 있어도 살고 없어도 살 수 있는 돈이네
점심을 거르며 환자를 보던 시간들이 떠오르네
세상에 거저 손 벌리면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네
부끄러워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내게 말한 친구 마음의 화덕을 헤아려 보네
2
세상은 주는 만큼 받고 싶은 게 인지상정인데
사람들 중에는 그렇지 않은 이들도 더러 있네
잘못했다고 사과하러 온 친구와 술 한잔하다가
또 정치를 하려는 다른 벗에게 싫은 소리를 했네
한때는 우리 친구들의 빛나는 별이었지만
일에는 때가 있는 법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네
그 친구에게 한 싫은 소리 한 마디가 마음에 걸려
이른 새벽 깨어 잠을 설치네 나이 들어 벗을 잃으면
다시 되돌릴 수 없다고 하는데 안으로 삭히면 될
말 한마디 잘못 내뱉어 새벽부터 홀로 괴로워하네
동무야 어지러운 마음 가을바람에 훌훌 털어버리세
♧ 火宅 - 김세형
광장은 밤마다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불타’는 백만
군중들의 뜨거운 횃불로 불바다처럼 ‘불타’오르고 있었다.
‘불타’는 현실 세상의 삶에 지친 선량한 시민들은 ‘불타’는
집에서 장난감 놀이에 푹 빠진 아이들처럼 스스로 자신의
아바타가 되어 메타버스 세상 속으로 들어가 각자 자신들이
꿈꾸던 유토피아 집을 짓고 살며 또 다른 아바타들과
‘불타’는 섹스를 나누며 자신들의 몸집들을 불태우고 있었다.
오직 ‘불타’만이 ‘불타’는 세상집 한가운데에 가만히
정좌하고 앉아 두 눈을 반개한 채 조용히 숨을 고르며
‘불타’고 있는 자신의 타오르는 마음집 불길을 끄고 있을 뿐,
그 누구도 ‘불타’고 있는 자신의 마음집 불길을 끄려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세상을 바꾸려 하지만
정작 자신을 바꿀 생각은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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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프 톨스토이.
* 월간 『우리詩』 2022년 12월호(통권 414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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