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시]
♧ 풀무치 - 강덕환
빈 몸 하나라면 너끈하겠지만 안아도 보고, 업기도 하고,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잠시 부려 쉬면서도 아들 녀석 건사하며 오름 오르기가 수월치 않습니다 이제야 말을 익혀 노란색, 보라색 풀꽃 이름을 물어오지만 어, 어, 그래, 대답할 새도 없이 숨이 턱에 찹니다 가까스로 올라간 정상에서 자 봐라, 저 분화구는 네가 태어난 자궁이다 애비의 등을 타야만 볼 수 있는, 심연의 저 밑바닥
분화구 주위를 한 바퀴 돌다가 풀섶에 웅크린, 어미 등에 업힌 애기 풀무치를 보았습니다 녀석이 살금살금 다가가 잡았습니다 멀리 날아가는 습성을 어미는 잊고, 애기는 익히지 못했습니다 한꺼번에 두 마리씩이나 잡았다고 환호하는 사이, 어미의 입가에선 흙색의 진물 흐르고 내 입에서도 단내가 납니다
가만히 놓아주고도 따로는 멀리 떠나지 못해 주위를 서성이는 풀무치 부자였을 거라고 믿으며 돌아온 날 저녁, 녀석은 오히려 나를 어르며 아픈 허리 꾹꾹 밟아줍니다
♧ 가을산행 – 강상돈
꺼질 수 없는 여름날이 여태까지 타고 있는
단풍잎도 따라나선 사라봉 산책길에
한 마리 직박구리가 고요를 깨고 있다
굳은살도 이런 날이면 단풍물이 드는가
타오르지 못한 꿈 가슴 깊이 품을 때
제 몸을 뜨겁게 태운 흔적 하나 보인다
듬성듬성 밟아온 아픔은 지워졌다
근육질 저 소나무 나선형으로 길을 내주고
오늘도 놀을 벗 삼아 가쁜 숨을 내젓는다
♧ 감나무와 할머니 – 오승국
감나무가 있었네
무자 기축년 난리 통에 할아버지는
그 감나무에 꽁꽁 묶인 채
토벌 군인이 쏜 총에 쓰러지고
할머니는 그 후 나무 곁에 집을 지어
감나무를 지켰네
이제 늙은 감나무는
할머니의 지나온 세월만큼
무수한 열매를 달고
늦가을 푸른 하늘 붉은 단심으로
등불 되어 달려있네
붉게 익어 떨어질 때까지
참새밥 까마귀밥 되어 없어질 때까지
살아생전 단 하나의 등불도 끌 수 없다던
할머니는 저 붉은 것들이
모두 내 흘린 눈물이여
먼저 가신 할아버지의 얼굴이라며
금세 눈물 머금고 돌아서네
♧ 은행나무 아래서 - 변종태
기원전의 나를 해독하는 일은
오래 살아온 동굴의 벽화를 해독하는 일
지린내 풍기는 삶의 벽에 굵은 나무 하나 그려 넣고
맨손으로 은행을 까는 일
노오란 들판에서 짐승 한 마리 떠메고 돌아오는 일
심장 따뜻한 짐승의 가죽을 벗기며
붉은 웃음으로 가족들의 안부를 묻고
일회성 삶의 지린내를 맡으며 오늘 밤의 포만으로
다시 기원후의 삶을 동굴 벽에 그려 넣으며
맨손으로 은행을 까는 일은
기원전 내 모습이 핏빛으로 물드는 일
퇴근길 은행나무 가로수 아래를 지나다가
은행을 밟은 채 버스에 올라탔을 때의 난감함
벽화에 다시 핏빛 노을이 번질 때
등 떠밀려 사냥터로 나가는 가장의 뒷모습
지린 은행처럼 창밖에는 사냥감 한 마리 보이지 않고
기원전의 생을 기억하는 일은 다시
맨손으로 익은 은행을 주무르는 일
화석이 된 가장의 일과를 동굴 벽에 그려 넣으며
어제의 포만을 기억하는 가족들의 흐뭇한 얼굴을 추억하는 일
은행나무 아래를 조심스레 걸어서 만원 버스를 타는 일
기원전 내 생의 벽화가 희미해가는 일
은행나무 아래서 기원후의 나를 추억하는 일
*한수풀문학회 간 『한수풀 문학』 2022년 제17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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