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한수풀 문학' 2022년 제17호의 시(1)

김창집 2022. 12. 23. 00:40

[초대시]

 

 

풀무치 - 강덕환

 

 

  빈 몸 하나라면 너끈하겠지만 안아도 보고, 업기도 하고,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잠시 부려 쉬면서도 아들 녀석 건사하며 오름 오르기가 수월치 않습니다 이제야 말을 익혀 노란색, 보라색 풀꽃 이름을 물어오지만 어, , 그래, 대답할 새도 없이 숨이 턱에 찹니다 가까스로 올라간 정상에서 자 봐라, 저 분화구는 네가 태어난 자궁이다 애비의 등을 타야만 볼 수 있는, 심연의 저 밑바닥

 

  분화구 주위를 한 바퀴 돌다가 풀섶에 웅크린, 어미 등에 업힌 애기 풀무치를 보았습니다 녀석이 살금살금 다가가 잡았습니다 멀리 날아가는 습성을 어미는 잊고, 애기는 익히지 못했습니다 한꺼번에 두 마리씩이나 잡았다고 환호하는 사이, 어미의 입가에선 흙색의 진물 흐르고 내 입에서도 단내가 납니다

 

  가만히 놓아주고도 따로는 멀리 떠나지 못해 주위를 서성이는 풀무치 부자였을 거라고 믿으며 돌아온 날 저녁, 녀석은 오히려 나를 어르며 아픈 허리 꾹꾹 밟아줍니다

 

 

 

가을산행 강상돈

 

 

꺼질 수 없는 여름날이 여태까지 타고 있는

단풍잎도 따라나선 사라봉 산책길에

한 마리 직박구리가 고요를 깨고 있다

 

굳은살도 이런 날이면 단풍물이 드는가

타오르지 못한 꿈 가슴 깊이 품을 때

제 몸을 뜨겁게 태운 흔적 하나 보인다

 

듬성듬성 밟아온 아픔은 지워졌다

근육질 저 소나무 나선형으로 길을 내주고

오늘도 놀을 벗 삼아 가쁜 숨을 내젓는다

 

 

 

감나무와 할머니 오승국

 

 

감나무가 있었네

무자 기축년 난리 통에 할아버지는

그 감나무에 꽁꽁 묶인 채

토벌 군인이 쏜 총에 쓰러지고

할머니는 그 후 나무 곁에 집을 지어

감나무를 지켰네

 

이제 늙은 감나무는

할머니의 지나온 세월만큼

무수한 열매를 달고

늦가을 푸른 하늘 붉은 단심으로

등불 되어 달려있네

 

붉게 익어 떨어질 때까지

참새밥 까마귀밥 되어 없어질 때까지

살아생전 단 하나의 등불도 끌 수 없다던

할머니는 저 붉은 것들이

모두 내 흘린 눈물이여

먼저 가신 할아버지의 얼굴이라며

금세 눈물 머금고 돌아서네

 

 

 

은행나무 아래서 - 변종태

 

 

기원전의 나를 해독하는 일은

오래 살아온 동굴의 벽화를 해독하는 일

지린내 풍기는 삶의 벽에 굵은 나무 하나 그려 넣고

맨손으로 은행을 까는 일

노오란 들판에서 짐승 한 마리 떠메고 돌아오는 일

심장 따뜻한 짐승의 가죽을 벗기며

붉은 웃음으로 가족들의 안부를 묻고

일회성 삶의 지린내를 맡으며 오늘 밤의 포만으로

다시 기원후의 삶을 동굴 벽에 그려 넣으며

맨손으로 은행을 까는 일은

기원전 내 모습이 핏빛으로 물드는 일

퇴근길 은행나무 가로수 아래를 지나다가

은행을 밟은 채 버스에 올라탔을 때의 난감함

벽화에 다시 핏빛 노을이 번질 때

등 떠밀려 사냥터로 나가는 가장의 뒷모습

지린 은행처럼 창밖에는 사냥감 한 마리 보이지 않고

기원전의 생을 기억하는 일은 다시

맨손으로 익은 은행을 주무르는 일

화석이 된 가장의 일과를 동굴 벽에 그려 넣으며

어제의 포만을 기억하는 가족들의 흐뭇한 얼굴을 추억하는 일

은행나무 아래를 조심스레 걸어서 만원 버스를 타는 일

기원전 내 생의 벽화가 희미해가는 일

은행나무 아래서 기원후의 나를 추억하는 일

 

 

              *한수풀문학회 간 한수풀 문학2022년 제17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