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람이 부는 소리 – 양수자
우거진 아카시아 나무숲을 헤쳐가면
잃어버린 소녀적 자매의 가슴 젖어오고
산딸기 알알이 풀숲에 익는 학교 가는 지름길에
여름의 한창 풍성한 과실처럼 어우러졌다
아무도 없는 이 길 기억 속에
한 조각 사금파리 보석으로 남아 있지 않았는가
구부러진 나의 허리 한 묶음의 청춘을
묘표도 없이 묻고 왔다
발부리 휘감기는 숨비기꽃 헤치면
이끼 핀 바위엔 나비 날개 같이 말라붙은
꽃잎의 이즈러진 형태를 본다
이는 숨길 수 없는 소녀적 시절의 흔적
다시 생생한 그 날 그대로의 아픔이 오누나
지그시 눈 감고 돌담에 기대서면
여름은 숨이 찬가 봐
다시 되돌아오는 바람결조차
숨결 바쁘게 풀숲을 감돈다
♧ 꿋꿋하게 – 양태영
깨어지는 아픔도 모르고 제자리에
풍진 세상 다 겪어도 언제나 그 모습
우리의 인생사에 꿋꿋함 보자꾸나
희로애락 인간사 세상천지 변하여도
자신 이름 그대로 지니는 그 모습들
인간사 대대손손 이어가며 살리라.
♧ 감귤나무 - 이철수
귤 익어가는 과수원
마른 나뭇가지 같은
아버지의 직립 너머로
붉은 해가 저물고 있다
나는 몰랐다
새벽마다 밤마다
감귤나무 하나하나에
그리운 이름 걸어두고
밖으로만 나돌던
감귤나무 사랑
어머니의 잔소리에도
처진 어깨 일으키며
닳아진 무릎 이끌고
그림자로만 집안에 서성이던
쓸쓸한 그 이름 잊고 있었네
감귤나무 아래
야위어가는 아버지의 장화
위태롭게 바라보는
나를 부르는 소리
“아빠!”
아버지가 되어서 듣는 소리
울컥 가슴을 긋고 가는
나무마다
붉은 눈물이 둥글게 맺힌다
♧ 새별오름 – 임애월
단내 품은 햇살에선
잘 익은 풀 향기가 났다
설핏한 섬바람 타는
새별오름 민둥산엔
첫눈처럼 소복소복 삐비꽃 부풀고
극단조로 번지는 뻐꾸기 울음
거대한 몸 비트는
먼 바다 해조음에
아직도 모항의 불빛을
기다리는 누이야
꺼지지 않는 그리운 노래들
섬 기슭 기어올라 새벽별로 듣는다
♧ 그놈의 주독 땜에 – 홍창국
취기가 덜 가셨나
고놈의
주독 땜에
고약한
고
독설 한 마디에
그만
그 님이
영영
남이 되어버릴 뻔 했으니
이를 어쩌나
식음을 전폐하고서도
배곯은 줄도 모르고
밥이고 잠이고
눈도 감기지 아니하는
고약한
고놈의 주독에
미친놈이
고얀 심사 땜에
아니
착하고 선량한 아내가
왜
하필이면
그
고약한 주독에 빠져
괴로워했을꼬.
*애월문학회 간 『涯月文學』2022년 통권 제13호에서
*사진 : 한라생태숲 첫눈 스케치(2022. 12. 25.)
`
'문학의 향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수풀문학' 2022년 제17호의 시(2) (0) | 2022.12.29 |
---|---|
월간 '우리詩' 12월호의 시(5) (0) | 2022.12.28 |
고성기 시집 '이제 다리를 놓을 시간'의 시(11) (0) | 2022.12.25 |
계간 '산림문학' 2022년 겨울호의 시(1) (2) | 2022.12.24 |
'한수풀 문학' 2022년 제17호의 시(1) (2) | 2022.12.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