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월간 '우리詩' 12월호의 시(5)

김창집 2022. 12. 28. 00:08

 

눈부처 - 여연

 

 

나는 네 눈 속에 완성될 예정이었다

너는 내 눈 속에 완성될 예정이었다

우리가 무엇도 못되고 언저리에 맴도는 사이

네 눈에 가시가 돋고

내 눈에 가시가 돋아

나는 네 눈에서 가시가 되고

너는 내 눈에서 가시가 되었다

 

나는 네 입에 완성될 예정이었다.

너는 내 입에 완성될 예정이었다.

우리가 깊이 말하지 못하고 제 입에 머무는 사이

네 입에 가시가 돋고

내 입에 가시가 돋고

나는 네 입에서 가시가 되고

너는 내 입에서 가시가 되었다

 

몰랐다 우리는

서로 눈과 입 속에서

꽃이 될 수 있다는 걸.

 

 

 

시간의 뼈 백수인

 

 

수백 년 묵은 종가 터

장독대 옆 우거진 풀을 매다가

우연히 동물 뼈 한 조각을 발견했다

그 밑을 가만가만 호미로 파 보니

계속 무수한 뼈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어떤 뼈에는 선선한 가을바람이 묻어 있고

어떤 뼈에는 어두운 숲속을 헤매는 가쁜 숨소리가 들어 있다

어떤 뼈에는 포악한 탐욕의 이빨 자국이 찍혀 있고

어떤 뼈에는 매미 우는 소리, 귀뚜라미 소리,

새들 지저귀는 소리들이 화석으로 고여 있다

 

시간은 수많은 바람과 소리와 그림자들이 함께 지나가 버렸지만

그 단단함은 뼈의 모습으로 땅속에 고스란히 묻혀 있었구나

 

 

 

마지막 말 박봉준

 

 

불과 며칠 전

인근 장례식장에서

시인이 왔다고 반겨주던 상국이가

 

졸지에 유명을 달리했다고

부고가 왔다

 

상국이와 함께 있었던 자리에는 다시 상갓집 음식이 차려지고 죽은 목숨이 마지막 내놓은 돼지국밥에 숟가락을 담갔다

 

동창생들은 고인의 사인死因

술 때문이라 했다

 

조문을 마치고

이승에 남은 사람들의

이름표를 단 근조화환 터널을 빠져 나오는 동안

 

언제 술 한잔하자며 고인에게 던진

무심한 그 말이

 

비수처럼 날아왔다

 

 

 

직립 보행 권미강

 

 

왕복 8차선

종횡무진 차들을 바라보던

한 사내가 물었다.

무단횡단 범칙금이 얼마요

오만 원인데요

사내는 아무 말 없이 오만 원을 건네고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앞으로 나갔다.

차들이 질주하던 도로가 일순 정적에 휩싸였다

정면만 응시하며 도로를 횡단하는

사내에게 어느 누구도 경적을 울리지 않았다.

그 시각 그곳을 지나던

자들은 스스로 우주가 되었다.

단돈 오만 원에.

 

 

 

을왕리 바닷가 권순자

 

 

일몰을 보러

을왕리에 갔네

 

꼬리 문 자동차 행렬에 길이 막혀

물에 잠겨 붉게 출렁이는 해를 보지 못했네

 

노을이 바다에 잠겨

가늘게 흔들리는 저녁을 만났네

 

겨울바람이 매섭게 바다를 달려와

시린 손으로 뺨을 만졌네

 

섬이 어둠에 잠겨 가고

가게 불빛이 달아올랐네

 

폭죽이 터지고 덩달아

어둠도 몇 번씩 터졌네

 

탁탁 허공에서 터지는 불꽃

팡팡 가슴속에 터지는 쓰라린 기억들

 

불꽃이 사라지고

무거운 흔적도 사라져 갔네

 

 

                *월간 우리202212월호(통권 41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