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유종 시집 '푸른 독을 품는 시간'의 시(4)

김창집 2023. 2. 5. 01:00

 

세차

 

 

젊은 여자가 기관차에 부닥쳐 죽었네

그러니까 그녀는 스물 몇 해의 생을

기관차 정면에 대고 깨부숴버렸는데

이런 젠장 기관사가 또 며칠 실종되겠군

환영을 보겠군

악몽에 시달리다

결국 차를 내릴지 모르겠군

우리는 기관차에 붙어 있는

그녀의 실패 희망 절망 사랑 따위를 걸레질하겠군

입 닫고 마구마구 세제 뿌려가며

지워지지 않으려 안간힘 쓰는 본능마저

세차 솔 바꿔가며 빡빡 무질러 닦아내겠군

며칠간 차고에 망치 소리만 땅땅거리겠군

이런 니미 옆 동료에게 쌍욕하는 신참

달래려 술 퍼마시겠군

이런 지랄 눈물 글썽해지는 날이 늘어가겠군

 

 

 

파업

 

 

파업을 선언하면 낯설다

 

기차가 낯설고

새벽안개가 낯설다

 

점검 함마를 쥔 손이

오너라 가거라 깜빡이는 전호등이 낯설고

 

오래된 동료가 갑자기 낯설고

아이들 얼굴이 낯설다

 

투쟁 명령 사수하는

우리들 진로가 낯설다

 

그러나 파업은

마이크를 위한 석탄*

 

모든 노동자에게 던지는 석탄

 

스패너 쥐었던 손으로 깃발 흔들며

때로 다가오는 낯섦도 껴안고 가자는 것

 

---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 제목.

 

 

 

죽음에 관한 보고

 

 

비린내가 낮차에 걸려왔네 검수비트 안에서

점검하는 여자의 비극적 종말이라니

어떻게 달래야 하나 죽음의 흔적 떼어 내지 못한

기관사처럼 실종되어야 하나

오산 지나 그대가 마지막으로

걸었던 길에 촉수를 대야 하나

저 파행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말들이 전화기 속에서

빠르게 쏟아지네 저 조급함들

육하원칙에 다 집어넣을 수 없는데

A4 한 장으로 끝내라고 하네

보고서는 아 씨발 욕처럼 관행적이네

저 지독한 비린내를 어떻게 종이 한 장으로

닦으란 말인가

 

하루가 질긴 힘줄처럼 연결기에 걸려 있네

아이처럼 따라온 그대 변명은 누락될 것 같은 날

구내 밖은 만화방창 하시절인 것 같은 날

보고서에 그대 눈물 한 방울도 염하지 못한 날

수정된 사고보고서는 이렇게 끝난다네

원인불명

열차도 죽음도 이상 없음

 

 

 

앉은뱅이책상 앞에서

 

 

공부는 아침 공부가 최고라고

아버지는 잠 덜 깬 오 남매 책상에 앉혔다

우리는 앉은뱅이책상 앞에서 눈비비거나

바 깔고 엎드리거나 꾸벅꾸벅 졸거나

슬금슬금 화장실에 가거나

일어나지 않는 동네 이야기를 침 발라

일기장에 적기도 했는데

 

어느 날 탁발승에게

앞으로 일어날 이야기

보리쌀 됫박만큼 얻어들은 어머니의

솥뚜껑 닫는 소리는 조심스러워지고

그 이야기처럼 내 코밑 털도 거뭇해지고

나와 두 동생은 생솔가지 냄새 옷깃에 달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서울로 갔는데

 

아버지 돌아가시고 남매들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먼저 세상을 뜨고

짝을 들이고 아이 낳고 솔가해서

아이들 앞에서 아침 공부가

얼마나 소중한지 아버지처럼 이야기하는데

 

오늘 아침 나는 앉은뱅이책상 앞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슬금슬금 화장실 갔다가

내일을 당겨 적었던 어젯밤을

뒤로 하고

오늘로 출근하는 것이다

 

 

 

공소 시효

 

 

관계에서 공과 사를 구분하는 것은

어려운 국어 시험 같은 것이었습니다

, , 저는 공적이었을까

연민을 느꼈다면 사적인 감정이

개입한 범죄였을까

내 사랑은 전근대적이었을까

시는 발전하지 않고 발견되는 것인가

오랜 망설임의 끝은 밥벌이를 그만 두고

바람 골에 서는 것이었습니다

이곳에서 공소 시효를 기다리며

봄을 뜯어내 바람벽을 두르고

긴 겨울잠을 자는 것이었습니다

몇 년이 지난 어느 여름

죽어있는 한 마리 새 곁을 맴도는

작은 새 한 마리를 본 날이었습니다

날지 못하는 새를 본 것 같은

한 번의 시간이 두 번의 시간을 껴안던 날

무거워진 흐느낌이 창문을 두드리던

그날 창문을 열고

오랫동안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공소 시효일이 얼마 남지 않았던

그날의 작은 가슴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다시 시효는 연장되어야 하는가

이쯤에서 끝내야 하는가

, , 저 뒤에 사랑이 붙으면

나는 객관적으로 안정되는가

완전범죄가 성립되는 것일까

 

오늘을 최후라고

하던 날들이 또 지나갔습니다

 

 

            * 유종 시집 푸른 독을 품는 시간(도서출판b, 2022)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