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한수풀문학' 2022년 제17호의 시(5)

김창집 2023. 2. 3. 00:56

 

 달맞이꽃의 망명 - 이정은

 

 

모국어를 잃어버렸어요

돌아갈 배편은 어디로 흐를까요

혼자 맴돌다 들어온 섬

 

익숙한 곳에서 멀어져야 가고픈 곳에 닿게 되는 거야

팻말 하나 서 있었어요

달맞이꽃의 말일까요

꽃은 서쪽으로 기울다가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텐데요

 

산보다 바다가 높아요

파도와 파도는 도형처럼 굴러 기억 밖으로 달아납니다

높아지는 벽은 바다라서 그런 걸까요

뛰어들어야 할까요

 

뭉쳐지지 않은 모래알처럼

대답은 흩어지고 말았어요

무너지는 소리를 모아요 발이 젖어요

아무도 알 수 없었지요 왜 발이 젖는지

모국어를 잃어버린 달맞이꽃을 기억하나요

 

섬은 흔적 없이 가라앉는 연습을 하고

돌담 사이 불어오는 바람

달맞이꽃을 품은 채 하늘거리고

 

여긴가요

다른 곳으로의 망명

한 번 더 밀어내 볼까요, 믿어 볼까요

 

 

 

무상찻집 이상언

 

 

간판 없고

주차장 없고

한 번도 안 와 본 이는 있어도

한 번만 온 이는 없다는

생각 없는 찻집

작년 여름휴가 후

휴식에 들어간다는

좋은 시절

좋은 모습으로

다시

찾아뵙겠다는

낡은 것을

좋아하는

생각 없는 찻집

창백한 푸른 점이야기를 듣고

내년엔

내년엔

 

 

 

조개껍질 무덤 1 이성윤

 

 

지루한 시간 속을 달려온 인류의 문명은

보랏빛으로 퇴색된 추억일 뿐이었다

 

파란 바다 모퉁이

조개들의 껍질 모래 속에 숨죽이며 쌓여만 가는

작은 신화 속으로

부서질지언정 부패하지 않았다

 

 

 

그날 밤 - 이윤영

 

 

새벽 112

온 동네 취침 시간

24시 편의점 CCTV에 다 찍히고 있었다

마셔도 너무 많이 마셔 취해버린 고급외제 차량

혀가 말린 도로를 질주하고

커브를 돌다가 정신이 몽롱해 속도를 멈추지 못하고

그대로 성난 호랑이가 되더니

커다란 굉음소리와 함께

 

!”

 

에어백이 터지면서 차주는 목숨을 건졌지만

대문 앞에 세워놓은

나의 늙은 애마는 !” 소리 한번 지르고는 뒷바퀴가 강제 발치되어

바퀴는 굴러가고 삐죽하게 튀어나온 플라스틱 파편들

그르렁 그르렁거리며 담벼락에 머리를 박고 끙끙대고 울고 있었다

이제는 아스팔트 도로 위를 달리는 꿈도 산산이 조각나 버린 그날

견인차에 끌려가고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애도하는 마음과 소중했던 기억을 쓸어 담아야 했고

애마도 없이

걸어오는 밤길엔

별들도 총총히 명복을 빌어 주고 있었다

    

 

 

몽유병 차영옥

 

 

화려한 조명 아래서 잠에 빠져들면

어김없이 거센 파도가 나를 덮친다

회색의 구름 위에 둥둥 떠 있는 난

그 속에서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을 쳐보지만

허우적대기만 하고

 

불빛마저 사라진 암실의 세상에서

아롱하게 흘러나오는 짙은 푸른빛

그것은 거대한 바다였다

고요함으로 가득하다

 

 

 

비눗방울 우주 한요나

 

 

바람이 낳은

방울방울,

찰나가 일렁이는

눈 감았다 뜨면

떠오르고

지고

떠오르고

지고

 

수많은 우주들

방울방울

태어나진다

 

 

             *한수풀문학회 간 한수풀문학2022년 통권17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