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늘의 질량
아홉 마리 용이 한 그루 꽃나무를 피운다는 대승원 귀룽나무
나무 그늘에 나무 한 그루가 다 들어있다 그늘의 한쪽을 막으면 고요다
귀룽나무 백 년의 그늘을 다 밟은 점박이 고양이 한 마리 몸 안의 캄캄한 골목을 다 건넜다 분홍 발바닥 근처 상처 난 그늘을 핥는다
그늘을 열고 그늘을 굴리고 그늘을 논다
고양이를 쓰다듬으면 저승이 축축하다 고양이가 그늘을 몰고 다닌다 그늘마다 미지근한 꼬리가 길다
명부전 금강경을 머리에 얹은 염라대왕 이마까지 꽃잎이 다 번졌다 그늘은 머리와 꼬리가 분별이 없는 꽃 머리부터 꼬리까지 다 열렸다
♧ 새를 깨닫다 2
관흉국 사람들은 가슴에 구멍이 나 있다. 존귀한 이는 옷을 벗고
비천한 것들로 하여금 대나무로 가슴을 꿰어 들고 다니게 한다.
-산해경
달걀을 놓쳤다
내가 깨트린 새의 얼굴
흰빛으로 가득 찬
어떤 뭉클함
새의 어둠 속으로 뛰어드는
부서진 새
그리하여 세상의 모서리가 흩어진다
아름답게 사라지기란 얼마나 힘든 것인가
물로 가득 찬 것들의 눈은
진흙 냄새가 난다
대화할 수 있다면
느린 화살나무여도 괜찮다
대화란 늘 아픈 것이라
기억 속의 사람들이 모두 아프다
너무 가깝지 않게
너무 멀지 않게
미학적 거리란
커다란 개의 이빨 자국처럼
차고 깊은 상처
기침을 하면
화살이 꽂힌 흰 새가 튀어나온다
심장 근처까지 다녀온 게 틀림없다
♧ 소년 A
나는 태양을 파기했다
불타는 두 날개를 펼치고
영혼의 긴 복도를
의심 없이 걸어가리라
소년이 시작된다
♧ 소년 B
질문이었다
다시 보면 불타는 상자였다
하루에 두 번씩 부끄러워했다
스스로 뺨을 때리는 유형이었다
앞은 액체였고
뒤돌아 갈 수 없었다
소년 B가 달리면
소년이 소년 속에서 부딪쳤다
배구선수처럼
두 손을 번쩍 들어
세계의 경멸과 부딪친 눈빛이었다
흰색은 그렇게 탄생한다
♧ 청소년
자막이 없다
가장 난폭한 계절
모든 물 컵을 뒤집는 것
여왕 코끼리가 지나가는 밤 같은 것
뒤섞이는 것들
놀이터에 골목에 오락실에
피부병처럼 번져 있다
청춘을 격파하고
염소처럼 들판을 먹어치우며
소년은 소년을 필사적으로 견딘다
방랑이란 없는 두 발을 서럽게 만지는 것
소년들
어떤 공화국을 다녀온 것일까
탐정 냄새가 난다
함부로 열지 말라
사용하고 난
청소년은 제자리에 두어야 한다
초침소리가 난다
♧ 방 탈출
고백하건대, 어머니
*
내 방은 불편한 천국입니다
*
어머니
나도 나와 겨루는 중이에요
방이 반복됩니다
*
어머니
나는 침대 위의 보트피플입니다
다리가 잘린 유니콘입니다
실패한 개인입니다
어머니 나는
*
계속 실패한다면
계속 쓸모없어진다면
어머니
나는 당신에게 불편합니다
아버지에게 불편합니다
국가에 불편합니다
자연에 불편합니다
괴벨스가 방을 활보하고 있습니다
*
단순한 것이 가장 완벽하다는
애플 창업주의 말처럼
나는 단순하게 생각하려 합니다
이 방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나는 채집되지 않을 겁니다
*
이번 생이 게임이라면
나는 저주의 방까지 다녀온 셈입니다
어머니
이 세계는 함정입니다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 루저들의 시간입니다
*서안나 시집 『새를 심었습니다』 (여우난골, 2022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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