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서안나 시집 '새를 심었습니다'의 시(8)

김창집 2023. 4. 4. 01:06

 

 

그늘의 질량

 

 

  아홉 마리 용이 한 그루 꽃나무를 피운다는 대승원 귀룽나무

 

  나무 그늘에 나무 한 그루가 다 들어있다 그늘의 한쪽을 막으면 고요다

 

  귀룽나무 백 년의 그늘을 다 밟은 점박이 고양이 한 마리 몸 안의 캄캄한 골목을 다 건넜다 분홍 발바닥 근처 상처 난 그늘을 핥는다

 

  그늘을 열고 그늘을 굴리고 그늘을 논다

 

  고양이를 쓰다듬으면 저승이 축축하다 고양이가 그늘을 몰고 다닌다 그늘마다 미지근한 꼬리가 길다

 

  명부전 금강경을 머리에 얹은 염라대왕 이마까지 꽃잎이 다 번졌다 그늘은 머리와 꼬리가 분별이 없는 꽃 머리부터 꼬리까지 다 열렸다

 

 

 

새를 깨닫다 2

 

 

     관흉국 사람들은 가슴에 구멍이 나 있다. 존귀한 이는 옷을 벗고

   비천한 것들로 하여금 대나무로 가슴을 꿰어 들고 다니게 한다.

                                                                              -산해경

 

달걀을 놓쳤다

내가 깨트린 새의 얼굴

흰빛으로 가득 찬

어떤 뭉클함

 

새의 어둠 속으로 뛰어드는

부서진 새

그리하여 세상의 모서리가 흩어진다

 

아름답게 사라지기란 얼마나 힘든 것인가

물로 가득 찬 것들의 눈은

진흙 냄새가 난다

대화할 수 있다면

느린 화살나무여도 괜찮다

대화란 늘 아픈 것이라

기억 속의 사람들이 모두 아프다

 

너무 가깝지 않게

너무 멀지 않게

미학적 거리란

커다란 개의 이빨 자국처럼

차고 깊은 상처

 

기침을 하면

화살이 꽂힌 흰 새가 튀어나온다

심장 근처까지 다녀온 게 틀림없다

 

 

 

소년 A

 

 

나는 태양을 파기했다

 

불타는 두 날개를 펼치고

영혼의 긴 복도를

의심 없이 걸어가리라

 

소년이 시작된다

 

 

 

 

소년 B

 

 

질문이었다

다시 보면 불타는 상자였다

하루에 두 번씩 부끄러워했다

스스로 뺨을 때리는 유형이었다

앞은 액체였고

뒤돌아 갈 수 없었다

 

소년 B가 달리면

소년이 소년 속에서 부딪쳤다

배구선수처럼

두 손을 번쩍 들어

세계의 경멸과 부딪친 눈빛이었다

흰색은 그렇게 탄생한다

 

 

 

 

청소년

 

 

자막이 없다

가장 난폭한 계절

 

모든 물 컵을 뒤집는 것

여왕 코끼리가 지나가는 밤 같은 것

뒤섞이는 것들

 

놀이터에 골목에 오락실에

피부병처럼 번져 있다

청춘을 격파하고

염소처럼 들판을 먹어치우며

소년은 소년을 필사적으로 견딘다

 

방랑이란 없는 두 발을 서럽게 만지는 것

 

소년들

어떤 공화국을 다녀온 것일까

탐정 냄새가 난다

 

함부로 열지 말라

사용하고 난

청소년은 제자리에 두어야 한다

초침소리가 난다

 

 

 

 

방 탈출

 

 

고백하건대, 어머니

 

*

 

내 방은 불편한 천국입니다

 

*

 

어머니

나도 나와 겨루는 중이에요

방이 반복됩니다

 

*

 

어머니

나는 침대 위의 보트피플입니다

다리가 잘린 유니콘입니다

실패한 개인입니다

 

어머니 나는

 

*

 

계속 실패한다면

계속 쓸모없어진다면

어머니

 

나는 당신에게 불편합니다

아버지에게 불편합니다

국가에 불편합니다

자연에 불편합니다

괴벨스가 방을 활보하고 있습니다

 

*

 

단순한 것이 가장 완벽하다는

애플 창업주의 말처럼

나는 단순하게 생각하려 합니다

이 방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나는 채집되지 않을 겁니다

 

*

 

이번 생이 게임이라면

나는 저주의 방까지 다녀온 셈입니다

어머니

 

이 세계는 함정입니다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 루저들의 시간입니다

 

 

                         *서안나 시집 새를 심었습니다(여우난골, 2022)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