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제주 4.3 75주년 추념식과 시화전

김창집 2023. 4. 3. 15:12

 

 

아무도 아닌 자*의 섬 원양희

 

   당신은 어느 해변에서 어느 계곡에서 어느 바위굴에서 어느 오름에서 모래가 되었나요 바람이 되었나요 사랑하는 이들이 눈앞에서 핏방울로 살점으로 흩어져 갔나요 뜨거운 각막의 고통, 기억의 세포마다 대못이 박혔나요 천 조각 만 조각 갈라진 가슴 부여잡고 비명조차 삼킨 채 숨죽여야 했나요 추위보다 배고픔보다 더 혹독한 건 사람이 사람을 믿을 수 없는 막막함이었나요 생명이 생명이지 못했던 폭력 앞에 광기 앞에 푸른 하늘 푸른 바다만 서럽게 서럽게 바라보았나요 아직 섬을 떠나지 못한 당신 영혼은 긴 침묵의 시간 건너 겹동백 붉은 꽃잎으로 피었나요 생채기 선명한 잎사귀가 되었나요 보랏빛 순비기꽃으로 피었나요 하얀 나비로 날아올랐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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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첼란의 시 찬미가.

 

 

 

 

열 밤 자민 이애자

 

 

아이는 스무 밤 열 밤을 ᄒᆞᆫ 밤 자민 세고

어머닌 열 밤 다섯 밤을 ᄒᆞᆫ 밤 자민 새고

제삿날 세고 샌 날도 희끗희끗 새어서

 

한 다리 건너 열에 아홉이 사삼유가족이라

고조모 총살에 가고 고모할망 행방불명이라

깊게 팬 슬픔조차도 허락지 않던 사월이라

 

오메기술 한 잔 두 잔 술기운이 오르면

제삿날마다 괜히 긁어대던 오촌당숙이

그토록 깽판을 놓고 풀어야 했던 응어리라

 

스무 밤 열 밤을 ᄒᆞᆫ 밤 자민 세는 제사에

열 밤 다섯 밤을 ᄒᆞᆫ 밤 자민 새는 제사에

성할망 혼절하고야 끝을 보는 제사에

 

애기고사리 열 밤 스무 밤을 ᄒᆞᆫ 밤 자민 세는

할미꽃 열 밤 다섯 밤을 ᄒᆞᆫ 밤 자민 새는

제삿날 동동 기다려 열손가락 꼽는 봄

 

 

 

 

점등 - 홍경희

 

 

새들이 둥지를 만들고

제 몸을 동그랗게 말아 포란하는 봄

 

할머니 손을 잡고 온 철 모른 아이의 뒤를 따라

평화공원 행불인묘지로 까마귀들도 혈손인 듯 날아와

반 쯤 빈 소주병 옆 사과 한 알 쪼아 먹고 날아가도

부화되지 않는 이름들

 

이 봄에는 다녀갈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잃지 말라고

봉개동 거친오름 산허리에

산벚꽃 하얗게 피었다

 

닫혔던 대문을 활짝 열어 놓고

열여덟 너를 기다린다

 

 

 

 

들개와 주구走狗의 시간* - 우동식

 

 

그때

그 당시

 

여순10.19에 투입된 일부,

진압군과 경찰은 국군도 경찰도 아니었다

 

그들은 고삐 풀린 들개였다

 

주인의 말에 충성하고 맹종하는

잘 훈련된 사냥개

피 냄새를 찾아 코를 벌름거리다

어디론가 쏜살같이 달려가

모가지와 살점을 물어뜯으며

허공에 개 짖는 소리를 질러댔다

 

이 빨갱이 새끼들을 모조리 죽여야 해

싹 쓸어버려야 돼

 

인간이

인간에게 자행한 눈 뜨고는 못 볼 짓거리

 

과잉 충성과 출세에 눈먼

캄캄했던, 들개와 주구走狗의 시간이여

 

 

 

 

시안모루*를 걷는다 오광석

 

 

중산간 낮은 돌담으로 두른 공간

항쟁의 날들이 저문 후

시간 숲에 묻혀버린 작은 공화국

조릿대 속에 감춰진 전선

경계 서던 산사람들은

저무는 해를 보며

살아갈 날들을 헤아렸다

 

산사람 얼굴이 장대 위에

꼬질꼬질한 모양으로 걸린 날

어두운 침묵의 궤 속에

산사람들을 감춘 산 사람들

바다 건너온 사상의 파도가

아이들을 삼키려 할 때도

감싸 안고 쓸려가지 않았다

 

산사람들이 걸었던 숲을

산 사람들의 아이들이 걸어왔다

날카로운 나뭇가지들 사이

흐윽 울음소리가 들렸다

고목마다 박혀있는 눈들

흔적으로 살아남은 산사람들

 

돌아온 햇살이

숲을 비추는 정오 무렵

희미하게 반짝이는 녹슨 솥단지

항쟁은 끝나지 않았다

돌아온 산 사람들의 아이들에게

말을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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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 중턱 중산간 마을 사람들의 피난처, 이덕구 부대 주둔지

 

 

 

 

             *사진 : 4.3 75주년 추념식 중계화면에서

             *: 4.3 75주년 추념시화전 서러울수록/ 그리울수록/ 붉어지는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