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무도 아닌 자*의 섬 – 원양희
당신은 어느 해변에서 어느 계곡에서 어느 바위굴에서 어느 오름에서 모래가 되었나요 바람이 되었나요 사랑하는 이들이 눈앞에서 핏방울로 살점으로 흩어져 갔나요 뜨거운 각막의 고통, 기억의 세포마다 대못이 박혔나요 천 조각 만 조각 갈라진 가슴 부여잡고 비명조차 삼킨 채 숨죽여야 했나요 추위보다 배고픔보다 더 혹독한 건 사람이 사람을 믿을 수 없는 막막함이었나요 생명이 생명이지 못했던 폭력 앞에 광기 앞에 푸른 하늘 푸른 바다만 서럽게 서럽게 바라보았나요 아직 섬을 떠나지 못한 당신 영혼은 긴 침묵의 시간 건너 겹동백 붉은 꽃잎으로 피었나요 생채기 선명한 잎사귀가 되었나요 보랏빛 순비기꽃으로 피었나요 하얀 나비로 날아올랐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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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첼란의 시 『찬미가』중.
♧ 열 밤 자민 – 이애자
아이는 스무 밤 열 밤을 ᄒᆞᆫ 밤 자민 세고
어머닌 열 밤 다섯 밤을 ᄒᆞᆫ 밤 자민 새고
제삿날 세고 샌 날도 희끗희끗 새어서
한 다리 건너 열에 아홉이 사삼유가족이라
고조모 총살에 가고 고모할망 행방불명이라
깊게 팬 슬픔조차도 허락지 않던 사월이라
오메기술 한 잔 두 잔 술기운이 오르면
제삿날마다 괜히 긁어대던 오촌당숙이
그토록 깽판을 놓고 풀어야 했던 응어리라
스무 밤 열 밤을 ᄒᆞᆫ 밤 자민 세는 제사에
열 밤 다섯 밤을 ᄒᆞᆫ 밤 자민 새는 제사에
성할망 혼절하고야 끝을 보는 제사에
애기고사리 열 밤 스무 밤을 ᄒᆞᆫ 밤 자민 세는
할미꽃 열 밤 다섯 밤을 ᄒᆞᆫ 밤 자민 새는
제삿날 동동 기다려 열손가락 꼽는 봄
♧ 점등 - 홍경희
새들이 둥지를 만들고
제 몸을 동그랗게 말아 포란하는 봄
할머니 손을 잡고 온 철 모른 아이의 뒤를 따라
평화공원 행불인묘지로 까마귀들도 혈손인 듯 날아와
반 쯤 빈 소주병 옆 사과 한 알 쪼아 먹고 날아가도
부화되지 않는 이름들
이 봄에는 다녀갈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잃지 말라고
봉개동 거친오름 산허리에
산벚꽃 하얗게 피었다
닫혔던 대문을 활짝 열어 놓고
열여덟 너를 기다린다
♧ 들개와 주구走狗의 시간* - 우동식
그때
그 당시
여순10.19에 투입된 일부,
진압군과 경찰은 국군도 경찰도 아니었다
그들은 고삐 풀린 들개였다
주인의 말에 충성하고 맹종하는
잘 훈련된 사냥개
피 냄새를 찾아 코를 벌름거리다
어디론가 쏜살같이 달려가
모가지와 살점을 물어뜯으며
허공에 개 짖는 소리를 질러댔다
이 빨갱이 새끼들을 모조리 죽여야 해
싹 쓸어버려야 돼
인간이
인간에게 자행한 눈 뜨고는 못 볼 짓거리
과잉 충성과 출세에 눈먼
캄캄했던, 들개와 주구走狗의 시간이여
♧ 시안모루*를 걷는다 – 오광석
중산간 낮은 돌담으로 두른 공간
항쟁의 날들이 저문 후
시간 숲에 묻혀버린 작은 공화국
조릿대 속에 감춰진 전선
경계 서던 산사람들은
저무는 해를 보며
살아갈 날들을 헤아렸다
산사람 얼굴이 장대 위에
꼬질꼬질한 모양으로 걸린 날
어두운 침묵의 궤 속에
산사람들을 감춘 산 사람들
바다 건너온 사상의 파도가
아이들을 삼키려 할 때도
감싸 안고 쓸려가지 않았다
산사람들이 걸었던 숲을
산 사람들의 아이들이 걸어왔다
날카로운 나뭇가지들 사이
흐윽 울음소리가 들렸다
고목마다 박혀있는 눈들
흔적으로 살아남은 산사람들
돌아온 햇살이
숲을 비추는 정오 무렵
희미하게 반짝이는 녹슨 솥단지
항쟁은 끝나지 않았다
돌아온 산 사람들의 아이들에게
말을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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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 중턱 중산간 마을 사람들의 피난처, 이덕구 부대 주둔지
*사진 : 4.3 75주년 추념식 중계화면에서
*글 : 4.3 75주년 추념시화전 『서러울수록/ 그리울수록/ 붉어지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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